딸이 태어나고,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프롤로그

by 참참





별생각 없이 쉽게 듣고 쓰다가 어느 순간 온몸으로 느껴지는 문장이 있다. 자주 써서 닳게 될 때쯤, 모두가 쓰는 그 흔한 표현은 속에 있는 정수를 들어낸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오만하게 그 말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했었는지 깨닫는다. 내게는 요즘 ‘Memento mori’라는 문장이 그렇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요즘따라 한참 되뇌는 말이야.”


몇 년 전 엄마가 이 말을 꺼냈을 때, 나는 이 글자의 얇은 의미만을 슬쩍 보며 넘겼다. 마치 서점에서 관심 없는 베스트셀러를 훑고 지나가는 것처럼.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하면, 어떻게 살지를 알게 된다.’ 멋지고 좋은 의미를 가진 만큼 많은 책과 영화에 그리고 타투에도 쓰이게 된 표현. 생각해보면 이 문장 속에 있는 빛은 죽음이 두려워졌을 때만 발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죽음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은 딸아이가 태어난 후였다. 참 아이러니다. 사랑스러운 존재의 탄생의 순간에 죽음을 생각하다니. 사실 아이가 처음으로 내 손에 들려지는 순간의 감정은 언어의 영역 밖이다. 가장 가까운 단어를 꼽자면 ‘경이롭다’ 정도일 듯하다. 어떻게 안아야 할지도 머뭇거리게 될 정도로 작고 귀여운 아이가 내 세계로 들어오는 건 생각보다 황홀하고 벅차다. 행복하고, 사랑스럽고, 신비롭고, 벅차고. 이런 긍정적인 단어들이 한 번에 나를 채우면 이내 무시 못할 두려움이 내리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대게는 우리 삶 바로 옆에 죽음이 놓여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게 되는 것 같다. 그만큼 죽음을 깊게 생각하고 기억하며 사는 것은 그리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딸아이를 만나기 이전의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하루의 모든 것이 적당했었기 때문이다. 촌스럽고 평범한 하루들이었지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편안한 행복이 내리 앉아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내 하루의 적당함이 사라지고 그곳에 불균형이 자리 잡았다. 이내 생과 사는 반대말이 아니라 서로 꼬여있는 실 같다는 걸 느꼈다. ‘내가 만약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두 손을 올리고 자는 우주





내가 죽는다면 우주에게 남겨줄 무언가가 있을까. 애석하게도 별 게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오늘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록하는 돈 안 드는 수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매일 밤 잠투정으로 우는 우주를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포근하게 잠들어 좋은 꿈을 꾸길 바라면서. 그런데 낮은 목소리로 엄마의 동화를 들려주다 보면 눈이 스르륵 감기는 게 아닌가. 그래서 번뜩 알게 됐다. 내가 이 작은 생명체에게 남길 수 있는 건 이 동화들이다.







* 딸아이 이름이 우주여서

제목이 '우주에 떠다니는 동화'가 될 것 같습니다.

* 글과 그림 모두 우주를 위해

직접 쓰고 그렸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