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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Nov 08. 2024

시시한 인간들의 소란스러운 삶

<북리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신과 똥

인간과 개

사랑과 외도

자유의지와 키치

영원한 회귀와 무의미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만난 재밌는 지점들이다. 신선하다. 저자 밀란쿤데라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의 얄팍한 페르소나를 벗기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직면할 수 있 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진지한 것과 시시것의 대비로 책이 내겐 도끼가 된다.


 4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인간의 양면성이 그려진다. 무거운 이상과 진지한 목적, 어른이라는 책무와 이성 앞에 무너지는 욕망과 본성. 개를 통한 순수한 애정과 계속해서 확인하고 구속하고 질투하고 또 외도하는 인간의 치졸한 사랑. 인간의 역사는 긴 세월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기보다는 바보 같은 실수와 잘못을 무한히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는 다르다고 본인은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다.
Es muss sein.



Part 1. 남과 여

끊임없이 반복하는 무거운 삶의 굴레

지적이고 우수한 인간의 상징, 토마시. 술집 종업원인 여인, 테레자와 사랑에 빠진다. 절대로 여자와 살지 않겠다던 그는 어느새 그녀와 살게 된다. 그러면서도 많은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하고, 동시에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순종한다. 테레자는 그의 외도를 알고 질투하고 악몽을 거듭하면서도 그와의 관계를 놓지 못한다. 그들은 상대의 허점을 인지하고도 받아들이고 또 함께한다.


부부라는 인연 

참으로 묘해서 상대가 같은 실수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관계를 끊어내기란 쉽지가 않다. 수많은 갈등과 싸움, 시도와 노력 끝에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힘겹게 깨닫게  뿐. 지지고 볶는 일상의 굴레는 무한히 반복된다. 마음의 평화를 얻는 단 하나의 지름길 변하지 않는 서로를 인정하는 것, 기대를 낮추고 그대로의 인간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정은 쉽지 않다. 흡사 엄청난 수련과 마음수양을 통해 다다르게 되는 신적인 경지라고나 할까. 남의 잘못을 잡아내고 지적하기는 쉽지만 내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기는 백배쯤 어려운 일이기에. 그래서일까. 마음의 평화는 언제나 요원한 일이다.



아기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

테레자도 젖먹이 아기 같은 토마시의 모습을  보게 되고 토마시 역시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서 꺼내진 아기 같은 존재인 테레자를 발견한다. 이 둘은 그런 미숙한 상태의 상대를 안아주고 품는다. 사랑이란 결국 아기 된 모습을 서로 끌어 앉을 수 있는, 상대의 미숙함을 알면서도 덮고 안아줄 수 있는 동정심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반대로 서로가 품을 열지 않고 안기기만을 바란다면 그 사랑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타인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자기 연민이나 나르시즘에 빠져 떼를 쓰거나 화를 내 서로를 밀어내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만다. 서로에게 부모가 되는 동시에 아기가 되기도 하는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 무거운 책임감과 가벼운 나약함을 동시에 보일 수 있어야 이상적인 부부거듭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길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 않다.

(58쪽)



믿고 기댈 수 있는 반려자가 있는 안전한 안식처는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함을 해결해 준다. 반대로 안전한 보호자를 찾을 수 없는 불안함은 유기불안으로 이어져 두려움을 초래한다. 그래서일까? 여자는 남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려 하고 남자는 밖에서 온갖 쾌락을 즐기다가도 집에 꼭 돌아오곤 한다. 유기불안은 서로를 옭아매는 치명적인 함정이며 안전장치다.


Part 2. 인간과 개


카레닌(애완견)과 자신을 잇는 사랑은 자기와 토마시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보다 낫다. (중략)
그것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이다. 테레자는 카레닌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490~491쪽)


테레자는 불완전한 인간의 사랑을 개와의 사랑과 빗대어 말한다. 인간의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일방적인 기대와 요구들로 얼룩지고 만다. 대가 없는 사랑, 기대 없는 사랑은 사람보다 개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졸지에 개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고매한 인간이 만든 사랑이라는 책무는 그 무거운 중압감에 서로를 옭아매는 처참한 결과를 맞이하곤 한다. 인간의 어쭙잖은 사랑의 행태는 얼마나 갑갑한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하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서로의 자유를 감시하고 훈계하고 또 억압했는가.  

 



Part 3. 반복과 발견

영원회귀와 무의미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492쪽)



인간의 행복은 어떤 목표지점이 이르러 얻게 되는 트로피와 같은 형상이라고 흔히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한히 반복되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모래알 같은 당연한 존재들 속에서 빛나는 조개껍질을 줍듯 발견하는 것이다. 발길에 채이는 그것을 보고 줍고 만질 여유가 없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마는.


종종 나도 뭔가에 홀리듯 이상적인 어떤 지점을 갈망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더디다. 다그쳐서 그 지점에 다다르려고 애쓰지만 반복된 일상의 덫에 걸려 그만 멈추고 만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잔잔한 그 일상이 행복의 시작점이었다. 나를 잡아당기는 그것은 나아감을 멈추게 하는 덫이 아니라 지금의 것을 충만하게 하는 필요였던 것일 수도 있겠다. 밖으로 나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 하는 나를 붙잡은 아이들의 시선과 바람은 엄마라는 존재로만 나를 묶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엄마라는 존재까지도 채워 온전해질 나를 만들려는 손짓이었을 수도 있겠다. 가정이라는 곳이 종종 내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수많은 책무에 갇혀 빠져나갈 수 없는. 매일 해야 하는 많은 일상의 것들을 '왜 그렇게 해야 하지?'라는 질문과 더불어 선택하고 덜다보면 일상의 덫에 걸린 발목의 조임이 조금씩 느슨해짐을 깨닫는다.


천국의 삶은 우리를 미지로 끌고 가는
 직선 경주와는 동떨어졌다.
 그것은 모험이 아닌 셈이다.
이미 아는 것들 속에서 뱅뱅 도는 삶인 것이다. 그 단조로움은 권태가 아니라 행복이다.
(488쪽)


거창하게 만들어놓은 행복이라는 표상은 어쩌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추구하는 비현실적 이상을 추구하다 결국 무의미와 권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동떨어진 것을 추구하는 인식의 틀을 전환하면 비로소 나만의 행복의 문이 열리게 될 텐데. 굳게 닫힌 유리창 앞에서 그것을 뚫고 나가려고 애쓰는 파리 같은 존재가 보인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바라보면 다른 한쪽 창문은 활짝 열려있는 데 말이다.



*출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꾼데라, 민음사, 이재룡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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