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을 운영하던 어느 가을, 저녁이었다.
8시쯤. 작업실 불을 끄고 나서려고 하는데,
"내일 친구 성묘를 가는데 꽃다발을 하나 주문할 수 있을까요? "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느 젊은 여성분이었다. "퇴근이 늦어 근처에 맡겨주시면 찾아가겠습니다."라는 부탁 외에는 별다른 요청사항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주문이었지만 만들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업실 불을 다시 켜고 꽃이 얼마나 있는지 꽃 냉장고를 급히 확인했다. 다행히 꽃다발에 들어갈 몇 종류의 꽃이 남아 있었다.
꽃 주문을 받으면 보통 제일 먼저 받는 분의 취향, 나이, 선물의 목적 등등을 주문자분께 여쭤 본 후 가장 적합한 꽃과 스타일을 결정한다.
하지만 이번 주문은 아무것도 여쭤볼 수 없었다.
그저 어떤 마음으로 주문하셨을까 하는 짐작과
꽃을 받을 친구의 마음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타인의 인생의 의미 있는 순간을 함께할 때가 많다. 보통 축하나 기념 또는. 고백 같은 행복한 순간이 대부분이고 격려나 위로의 순간을 함께할 때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 슬픔과 애도의 순간을 함께할 때가 있다.
주는 사람의 마음이 내게 그대로 전해져 내가 더 설레는 마음으로 꽃을 만들 때가 있고 받는 사람의 감동이 미리 눈앞에 그려져 내가 받고 싶은 마음으로 만들 때도 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누구의 마음도 감히 대신 가질 수 없었다.
그저 내 꽃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작은 위로가 돼줬으면 했고, 꽃을 받는 친구의 마음이 오랫동안 따뜻했으면 했다.
깨끗한 화이트 컬러의 리시안셔스와 따뜻한 솜털 같은 폼폰 국화 그리고 짙은 비누향이 나는 왁스 플라워를 넣어 단정한 꽃다발을 만들었다.
난 그렇게 두 분의 순간을 함께했다.
누군가는 나에게 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며 꽃은 그냥 꽃일 뿐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어느 영화 속 이야기처럼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받은 꽃다발이 아무 의미 없던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게 하는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남은 자들에게는 그의 죽음 앞에 놓인 애도의 꽃다발이 그들의 삶의 지탱해주는 유일한 의미가 되기도. 한다.
꽃은 늘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함께했다.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는 꽃부터, 아이의 입학식, 졸업식,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프러포즈와 결혼식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위로하는 추모의 꽃까지 인생의 선상에 놓인 모든 의미 있는 순간마다 꽃은 옆에서 함께 그 시간을 축복하고 애도하고 기억했다.
삶의 행복했던 순간을 함께하는 증언자로, 때로는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고 위로하는 방식으로 꽃은 매번 그 순간마다 우리 삶에 특별한 의미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꽃의 아름다움을 빌려 누군가의 특별한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좋다.
꽃은 그냥 꽃이 될 수가 없다.
난 오늘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꽃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