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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가의 꽃 Oct 06. 2021

천일동안 변하지 않는

천일홍

오랫동안 색이 변하지 않는다고 이름 붙여진 천일홍이라는 꽃이 있다.

까슬까슬한 작은 구슬이 줄기 끝마다 달려있는 이 귀여운 꽃은 앙증맞은 자태와 달리 사뭇 진지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천일동안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천일홍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은 조금 바랠지언정 자신 고유의 색을 오랫동안 잃지 않는 아름다운 꽃이다.


천일이라는 숫자는 많은 이들에게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천일의 약속, 천일의 기다림, 천일 후에, 천일동안 등등 우리는 천일을 앞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지키거나 혹은 변화시키고 싶어 한다.


천일이라는 유한의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지키고 싶을까, 또는 무엇을 바꾸고 싶을까

나에게 과연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까, 천일이 지난 후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 자주 했었던 것 같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심연 속에서 가만히 가만히 숨죽여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나도 내 존재를 망각한 채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다.


아마 무언가를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만 부서져 버리고 틈 사이로 흩어져 버리는 것들에 대한 나의 반발심리가 방어기제로 작용해 아무것도 지키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를 파괴함을써 실체 없는 무언가에 복수하고 싶었다.

천일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을 그렇게 나를 조금씩 지우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지워지지 않았다.

천일홍이 시간이 흘러도 색이 바랠지는 몰라도 자신 고유의 색은 잃지 않았듯  천일동안 내가 내가 아닌 척, 나를 지워버리고 사라지려고 할수록 더 깊게 나 자신은 나로 물들여졌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친구로부터  서점에 들렀다 우연히  어느 책을 보고 내가 떠올랐다는

친구의 연락이,

내가 만든 꽃은 나를 닮았다는 한 지인분의 말씀이,

내가 건넨 짧은 한 문장의 답변이 너무 나 같아서 웃음이 난다는 친구의 깔깔거리는 메시지가,

지운 줄 알았던 나도 몰랐던 나의 오래전 글들의 흔적에서

그리고

내가 아무리 나를 지워도 지우면 지울수록 번져만 가는 오래된 나의 꿈이 나를 나로 이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난 천일동안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못하고 더욱더 내가 되어버렸다.


.

왜 변하지 않느냐고, 왜 그대로 이냐고 묻고 싶지만 이제 알 것 같다.

천일이 지나도 지울 수 없는 자신만의 색이 있기에

천일홍인 것이고,

그리고 나일수밖에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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