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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지만 편안함은 함께 할 수 없다

by 염철현

중국 고대 춘추전국시대에 오나라와 월나라는 이웃이었는데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하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기원전 496년, 오나라 왕 합려(闔閭)는 월나라 왕 구천(句踐)과 싸우다 죽고 세손 부차(夫差)가 왕위를 이어남는다. 부차는 조부의 장례를 끝낸 후, 월나라에 대한 복수심을 다잡으려는 방법으로 시종을 조정의 뜰 가운데 세워놓고 자신이 출입할 때는 언제나 큰 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외치게 했다. "부차야! 너는 월왕이 네 조부를 죽인 것을 잊었느냐?" 그러면 부차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기원전 494년, 오나라는 월나라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농성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책사 문종(文種)을 오나라 태재(재상) 백비(伯嚭)에게 보내 녀와 금은보화로 매수하고 강화를 요청했다. 월나라에 매수된 백비는 부차에게 구천을 죽이지 말고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심히 설득하며 강화를 주선했다. 당시 오나라 조정에서는 구천을 죽여야 한다는 오자서(伍子胥)와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백비의 주장이 팽배하게 맞섰지만 오나라 왕은 백비의 손을 들어주었다(훗날 백비는 사익에 따라 행동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의 대명사가 되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이제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의 신하가 되어 월나라에서 살게 되었다. 이때 책사 범려도 동행했다. 말이 신하이지 포로였다. 구천은 포로로 붙잡혀 있으면서 합려의 묘지 지기와 마구간 지기 등 갖은 고생을 해야만 했다. 부차는 구천 부부를 조부 합려의 묘 곁에 석실 한 채를 짓게 하고 살게 했다. 부차가 매일 수레를 타고 밖으로 나갈 때, 구천은 말채찍을 잡고 부차의 수레 앞에서 걸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구천은 부차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면 부차의 똥까지 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구천은 병든 부차의 똥을 맛보고 얼마 후에 완쾌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 부차의 연민과 동정을 끌어내어 하루라도 빨리 월나라로 돌아가려는 범려의 계책이었다. 상분득신(嘗糞得信), 즉 '똥을 맛보고 신임을 얻는다'라는 고사의 유래다.


천은 드디어 부차의 신임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 부차는 오자서의 극구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천을 석방하여 월나라로 돌려보낸다. <동주 열국지>에서는 오자서의 말을 빌려 이때의 상황을 "어느날 구천이 조금이라도 뜻을 얻게 되면 호랑이를 산속에 풀어놓은 것처럼, 고래를 바다에 풀어 놓은 것처럼 제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기술한다.


천신만고 끝에 월나라에 돌아온 구천은 장작을 겹쳐 쌓고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침대와 이불은 사용하지 않았다. 또 앉고 눕는 처소에 쓸개를 매달아 음식을 먹고 기거할 때마다 쓸개를 맛보면서 복수를 다짐했다. 고사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유래다. 오늘날 와신상담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과 치욕도 참는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구천이 고통과 치욕을 견뎌내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는 생각을 하면 쉽게 사용하기 어려운 고사다.


구천은 오나라에 복수할 계획들을 실행에 옮긴다. 오나라의 강점과 약점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수립된 계획은 대략 일곱 가지이다. 첫째, 뇌물작전이다. 오나라에 많은 뇌물을 보내 왕과 대신들을 안심시키고 약소국 월나라는 강대국 오나라의 신하국이라는 착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둘째, 오나라에서 양식을 비싸게 사들여 저들의 창고를 텅 비게 하는 것이다. 셋째, 미인계다. 미녀를 오나라 왕에게 보내 그를 미혹하고 월나라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신하국인가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넷째, 국력소모다. 오나라에 솜씨 좋은 목수와 좋은 목재를 보내 궁궐을 지어주면서 저들의 재물을 고갈시키는 것이다. 다섯째, 아첨하는 신하를 보내 저들의 계략을 혼란시키는 것이다. 여섯째, 간언을 올리는 저들의 신하를 자살하게 만들어 보필하는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일곱째, 국력배양이다. 우리 재물을 축적하고 군사를 잘 훈련하여 만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실제로 실행에 옮겨진 사례를 들어보자. 오나라에서 건축공사를 벌이자 구천은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헌납함으로써 원래 계획보다 규모를 늘려 짓게 했다. 부차는 국력 소모를 위한 월나라의 계략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오히려 구천의 충성심을 흐뭇하게 생각했다. 미인계는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구천은 경국지색의 미녀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부차에게 바쳤다. 두 미녀는 3년 동안 부차를 접대하는 방법과 임기응변 대책에 대해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두 미녀는 월나라의 스파이였던 셈이다. 부차는 미모와 식견을 갖춘 서시를 총애했고, 그녀는 부차의 중차대한 의사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월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월나라는 오나라에 1만 석의 곡식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오나라 조정에서 찬반이 엇갈렸을 때, 부차는 서시의 의견을 물었다. 서시는 “대왕께서는 천하의 패권을 장악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이런 사소한 일조차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니 말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백성은 먹은 것을 하늘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대왕께서는 월나라에게 양식을 빌려 주지 않고, 설마 그들을 굶어 죽게 하시렵니까?” 부차는 서시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월나라에 곡식을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월나라에서는 빌린 양식을 오나라에 갚았는데, 부차는 월나라가 약속한 데로 갚자 매우 기뻐했다. 더구나 월나라에서 가져온 곡식은 알맹이가 크고 좋아 1만 석을 종자로 삼기로 했다. 오나라에서 종자로 심었던 곡식은 때가 지났어도 싹이 트지 않았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모두 썩어 있었다. 월나라에서는 모두 삶아서 말린 곡식을 보냈지만, 오나라에서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나라의 충신 오자서도 서시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나라 조정에서는 오자서와 백비 간의 권력 투쟁이 정변으로 확대돼 오자서가 백비의 모함을 받고 궁지에 몰렸다. 서시는 부차에게 “속담에 이르기를 의심 나는 자는 쓰지 않고, 쓴 자는 의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자서는 월나라를 멸망시키자고 주장하는 자이니, 그가 득세하면 맨 먼저 나 같은 월나라 사람을 죽일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오자서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차는 오자서에게 스스로 자결하도록 했다. 오자서는 죽기 직전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를 심어 왕의 관을 짤 목재로 쓰도록 하라. 아울러 내 눈알을 빼내 오나라로 들어오는 동문에 매달아 월나라 군사들이 쳐들어와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도록 하라”는 섬뜩한 유언을 남기며 스스로 목을 찔렀다. 부차는 오자서의 말에 화가 나서 시체를 말가죽 자루에 넣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최고권력자와 이인자의 관계가 이렇다. 오자서는 부차의 아버지 합려를 제후의 우두머리로 만들었고, 공자들이 태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툴 때 부차를 후계자로 세웠던 일등공신이 아니던가.


기원전 473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오왕 부차는 전에 구천을 살려 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월왕 구천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부차의 제안을 수용하려고 하자 범려(范蠡)가 반대했다. “옛날 하늘이 우리 월나라를 당신(오나라)에게 주었는데, 당신은 천명을 어기고 접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의 고생이 생겼습니다. 지금 하늘이 오나라를 우리(월나라)에게 주는데 우리가 만약 받지 않는다면, 천벌을 받습니다. 설마 회계산에서 치욕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범려의 직언에 정신이 든 구천은 부차를 바로 죽이지는 못하고 500호의 봉읍을 주어 살게 했다. 부차는 "오나라의 사직을 뒤엎고 종묘를 없애고 500호의 백성만 거느리고 살아가라 한다면, 과인은 늙어서 그렇게 살 수 없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업습니다"라고 말했다. 부차는 자결하면서 비단을 세 겹으로 접어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게 하고는 죽었다. "만약 죽은 자에게도 지각이 있다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오자서를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와신상담은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서야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길고도 모진 복수극이다.


오나라를 정복한 구천은 백비를 어떻게 대했을까? 백비는 비록 오나라 신하지만 구천에게는 그의 목숨과 월나라를 구한 일등공신이 아니겠는가. 백비는 구천에게 베푼 은혜를 믿는 듯 했다. 구천은 "네놈은 오나라 태재이지만 과인이 어찌 감히 네놈에게 허리를 굽히겠느냐? 너의 임금은 죽었는데 네놈은 어찌하여 그 뒤를 따르지 않느냐?"라고 나무라며 그와 일가족을 모두 잡아 죽였다. 범려는 어떻게 처신했을까? 범려는 벼슬을 내놓고 월나라를 떠났다. <사기> '월왕구천세가'에서는 범려가 월나라를 떠나면서 문종에게 남긴 편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가 다 없어지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아지는 법입니다. 월왕은 목이 길고 입은 뾰족하여 치욕을 참고 공로를 다투며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어도 안락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대부께서는 어째서 떠나지 않는가?(蜚鳥尽, 良弓蔵. 狡免死, 走狗烹. 越王為人長頚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 한편, 토사구팽을 맨 처음 사용한 인물은 오나라 왕 부차라고 한다. <한비자>에서는 "교활한 토끼를 잡고 나면 영리한 사냥개는 삶아서 먹는다. 적국이 멸망하면 모사는 반드시 죽는다(狡兎死而良犬烹, 敵國滅謀臣亡)"라고 기록한다. 토사구행이란 말을 누가 먼저 사용했던 '필요할 때는 소중히 여기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것'을 비유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책사 문종은 범려의 편지에도 불구하고 범려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에는 문종의 재능이 쓸모없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 문종이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아무도 그를 제압할 사람이 없을까 두려워했다. 구천은 문종에게 검을 내려 자살을 강요했다. 부차가 오자서에게 자결하라고 하사했던 그 칼이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범려와 문종은 선택과 결단이 달랐기에 운명을 갈라놓았다.


서시의 행방도 궁금하다. 구천은 오나라를 떠나면서 서서도 월나라로 데려왔다. 범려가 서시를 데려갔다거나, 구천이 서시의 미색에 미혹될까 두려워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동주 열국지>에 따르면, 구천의 아내는 서시를 나라를 망친 요망한 계집이라고 욕하며 허리에 돌을 묶어 강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서시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그 누구보다 큰 공로를 세웠는데 토사구팽당하고 말았다. '지나치게 큰 공은 보답받을 수 없다'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다.


문종이 월나라 왕 구천으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하고 600여 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초한쟁패기에 한나라 군대의 대원수로 유방이 천하통일을 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한신(韓信)이 토사구팽의 주인공이 되었다. <사기> '회음후열전'에서 한신은 유방의 황후 여치와 소하의 계략에 빠져 죽기 전에 범려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과연 사람들 말대로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훌륭한 개는 삶아지고, 높이 있는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지며, 적국을 깨뜨리면 지략을 쓰는 신하는 망한다'라는 것과 같구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진정 삶음을 당하겠구나!" 한신은 범려가 말한 '사냥개' 대신에 '훌륭한 개'로 표현을 바꿨다. 자신을 훌륭한 개로 비유했다. 반면에 한나라 개국 공신 장량(張良)은 제나라 땅을 봉토로 주겠다는 유방의 제의를 사양했다. 장량은 범려처럼 물러날 때를 알고 산속에서 조용히 은거생활을 하며 천수를 누렸다. 꼭대기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어려움은 함께 할 수 있지만 편안함은 함께 할 수 없다'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세계에서 볼 수 있는 예삿일이 되었다. 왜, 그럴까? 더 누리고 싶고 더 가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 때문일까. 성경의 잠언에서도 "지옥과 저승은 아무리 들어가도 한이 없듯이 사람의 욕심도 끝이 없다"라고 말한다. 인간 스스로 사냥개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세태가 슬프다.


풍몽룡. (2015). 동주 열국지. 김영문 옮김. 파주: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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