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패권을 놓고 다툴 때, 유방이 최후 승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항우는 전쟁을 치르는 데 필요한 객관적 전력에서 유방을 앞섰다. 천부적 전투능력을 지닌 항우의 개인적 능력 때문에도 유방보다는 항우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었을 것이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즉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라는 평가를 받은 항우가 최후를 맞는다. 항우는 오강(烏江) 근처에서 유방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지만 역부족임을 깨닫고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마지막 순간에서야 항우는 영웅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어쩌면 오늘날 항우에게 매료되는 가장 핵심은 마지막 순간에 깨끗이 목숨을 던진 항우의 용기와 기백 때문일 것이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은 '제오강정(題 烏江亭, 오강 정자에서 짓다)'라는 시에서 항우의 인간성과 기백을 기리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의 일이라 예측하기 어려우며
수치를 참고 견디는 것이 진정한 사내대장부라
강동의 자제들 중에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으니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면 승패를 알 수 없었으리
권토중래(捲土重來), 즉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왔다'는 위 시에서 유래했다. 권토중래에서 권(捲)은 '말권'을 의미한다. 즉 "흙(土)을 말면서(捲) 다시(再) 온다(來)"라는 뜻인데, '흙을 말다'라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눈을 감고 고대 전쟁터를 상상해 보자. 폭풍의 기세로 진격하는 병사들과 말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땅에 내딛는 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는 역동적인 상황이다. 한 편의 그림 같은 장면이다. 권토중래는 항우의 몰락을 안타까워하는 고사지만, 비유적으로는 한번 일에 실패하였으나 힘을 축적하여 다시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이다.
사실 항우의 죽음은 억울한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기원전 203년 항우와 유방은 '홍구(鴻溝)'를 경계로 천하를 나누기로 강화를 맺었지만, 유방의 책사 장량과 진평은 항우를 살려두면 두고두고 후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약속을 깨고 항우를 추격해 포위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유방의 신의에는 문제가 있다.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약속을 깨고 상대의 뒤통수를 노린 비열한 작태다.
유방에게 쫓긴 항우는 오강을 건너려고 했다. 배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던 오강의 정장(亭長)이 항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폐하! 강동은 비록 땅이 작으나 땅은 천리에 달하고 사람이 수십만 명이나 되오니 왕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대왕께서는 빨리 건너십시오. 지금 신만이 배를 가지고 있으니, 한나라 군이 도착하더라도 건널 배가 없을 것입니다." 항우는 웃으며 말한다. '하늘이 나를 망쳤는데, 내가 어찌 건너겠는가? 나를 따라나선 강동의 자제 팔천명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온 이후 한 명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설사 강동의 부형(父兄)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준다고 해도 내가 무슨 면목(面目)으로 그들을 보겠는가? 설사 그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홀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 (항우 연구자들에 따르면, 정장이 항우에게 한 말 때문에 항우가 강을 건너려는 마음을 바꿔 자결을 택했다는 주장을 한다. 정장은 항우가 강동에 가서 '왕을 할 수도 있다'라는 말로 항우를 위로하지만, 이미 폐하 소리를 듣으며 천하를 그의 말 한마디로 다스렸던 항우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깎여 자결을 택했다는 것이다).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쳤고 자기를 따라나섰던 젊은이들이 다 죽었는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돌아가겠는가라는 생각이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야 진실 앞에 겸손해지는가. 만약 항우가 강동으로 돌아갔다면 다시 재기할 수 있었을까? 그 당시의 정세로 돌아가서 생각한다면 재기하기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항우에게 두 가지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민심이반이다. 항우는 힘과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세상의 인심을 잃었다. 항우가 하늘이 나를 망쳤다고 말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 말일 것이다. 초회왕 의제를 시해하고, 진나라에서 항복한 20만 명의 병사를 생매장한 것만 봐도 항우는 백성들의 민심을 잃었다. 백성들은 항우를 마음에서 우러나 그를 왕으로 받들고 섬긴 것이 아니라 그의 보복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다.무신(武神) 항우는 왕도정치와는 거리가 한참 먼 패도의 길을 걸었다. 장량이 부추겨 지은 초패왕이란 이름에서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다. 둘째, 대세론이다. 그때 대부분 지역의 제후들 유방 쪽으로 귀의했고 항우의 기반이라는 강동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항우의 패도와는 다르게 유방은 덕으로 백성들을 감동시키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했다. 덕승재(德勝才), 즉 유방의 덕이 싸움 잘하는 항우의 재주를 이긴 것이다.
결론적으로 항우가 스스로 목을 벤 것은 영웅이 보여준 최상의 선택이었다. 만약 항우가 강동의 조그만 지역을 차지하고 유방과 대치하면서 농성을 벌이다 죽었다면 항우에 대한 영웅담은 지금 같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선택과 죽음'뿐이라는 말이 있지만, 항우가 자결을 선택한 것은 그의 비참한 말로가 후대에게는 동정과 연민 그리고 영웅의 기백으로 승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새가 죽을 적에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을 적에는 근본으로 돌아가 그 말이 진실하다'라고 하였는데, 항우가 죽기 전에 오강의 정장에게 한 말은 진실을 직시한 말이다. 항우는 부끄러움을 아는 인물이었고 구차하기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항우가 부끄러움을 알고 목숨에 초연한 기백과 용기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항우본기'로 기록하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서 영웅이 죽어서 불명예를 얻는 경우가 얼마 남은가. 항우는 영웅으로 살다 죽어서도 후세에 추앙받는 영웅의 전설로 남았다. 그러니 송나라 때 여류시인 이청조(李淸照)의 시는 항우에 대한 현대인의 평가를 대신하고 있다.
살아서는 인걸(人傑)이더니
죽어서도 귀웅(鬼雄)이네
지금 항우가 강동으로
건너지 않으려 했던 것을 생각하네
항우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죽는 순간까지 낯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 것인가? 최소한 면목과 염치를 아는 삶이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