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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의 이상형

장량

by 염철현

진나라 수도 함양을 먼저 차지한 사람에게 관중왕을 준다는 초회왕(웅심)의 약속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군권을 장악한 초패왕 항우는 무력을 앞세워 유방에게 파군, 촉군, 한중군의 땅을 떼어 주어 한왕(漢王)으로 임명하였다. 말이 임명이지 유방은 항우에게 쫓겨나듯 했다. 유방에겐 서쪽 변방으로 유배를 가는 것과 같았다. 유방은 분하고 억울하였지만 후일을 기약하며 파촉으로 가기로 한다. 유방과 함께 파촉으로 행군하던 장량(장자방)은 금우령 고개를 넘자 유방에게 작별인사를 한다. 돌아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리던 유방에게 장량은 한(韓)나라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 항우를 팽성에 도읍을 정하게 하고 함양을 비워두게 하는 일이다. 둘째, 천하의 제후들을 설득하여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에게 귀의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셋째, 유방이 한(漢)나라를 일으켜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필요한 대원수(大元帥)가 될 만한 인재를 널리 구해 보내는 일이다.


유방이 장량에게 묻는다. 장량이 대원수를 천거해 보내준다면 무엇을 증거로 그 피추천인을 믿어야 하느냐이다. 장량은 승상 소하와 한 통의 증문(證文)을 작성하여 두 조각으로 나눠 가지고 있다가 대원수가 될 만한 인재를 발견하거든 그 증표를 주어 보내도록 하겠다고 답한다.


장량은 한(韓)으로 돌아가면서 금우령 고개 일대의 잔도(棧道)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다. 어떻게 만든 잔도인데 그길을 불살라 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유방과 군사들이 돌아갈 길을 끊어버린 장량을 원망하고 있을 때 소하가 이렇게 말한다. "장량 선생의 말씀에 따르면, 잔도를 끊어 버림으로써 네 가지 이득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항우는 우리에게 회군의 의사가 전연 없는 줄로 알고 우리를 경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재, 항우는 장한과 사마흔, 동예 등을 삼진왕(三秦王)으로 임명하여 우리가 함양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길목을 지키고 있는데, 항우가 우리를 경계하지 않으면 삼진왕들의 경계태세도 절로 소홀해질 것입니다. 셋째, 군사들은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끊겼기 때문에 도망가기를 단념하고 대왕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넷째, 항우의 제후들은 우리에 대한 경계심이 없어지면 저희들끼리 세력 다툼이 일어날 것입니다." 장량은 잔도를 끊었을 때의 이점을 계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군과 적군의 심리 상태까지 고려했을 정도다.


한(韓)으로 가기 전에 친구 항백을 찾아간 장량은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는다. 항우가 장량이 유방과 함께 파촉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한왕(韓王)을 불러들여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소식이다. 한왕 시해사건은 한왕이 유방과 짜고 장량을 파촉으로 보냈다는 항우의 오해에서 비롯됐다. 이제까지 장량은 유방을 객으로서 도왔지만 이제부터는 개인적으로도 항우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장량은 항우의 철저한 패망을 위해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사람이 무슨 일을 도모할 때 대의와 함께 사적 복수까지 더해지면 그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한 법이다.


사실 장량의 가문은 한(韓)나라의 다섯 왕을 모신 재상 집안이다. 동서양을 통털어 이런 명문갑족도 드물 것이다. 장량은 조국을 멸망시킨 시황제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창해역사(滄海力士)를 시켜 시황제를 시해하려고 모의한 적도 있었다. 물론 시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장량의 조국 한나라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고, 언젠가 때가 되면 진나라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장량은 항우에 의해 한나라 왕이 시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분노와 적개심을 가졌겠는가.


장량은 유방과의 세 가지 약속을 지켰다. 그리고 장량이 유방에게 지킨 세 가지 약속은 초한대전에서 유방이 승리하고 항우가 패배한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첫째, 항우가 함양을 떠나 팽성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함양은 역대 왕조의 왕도였을 뿐 아니라 방어하기에 천혜의 요새로 알려졌다. 항우가 함양을 비우고 팽성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한 장량의 계략은 훗날 한신이 함양을 점령하는 데 필요한 사전 공작이었다. 둘째, 장량은 항우의 무력에 굴복하여 항우 진영에 가담했던 주변국의 제후들과 항우를 이간시켰다. 장량이 항우와 제후들 간을 이간시키는 전략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항우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었기 때문이다. 장량은 제후들에게 항우의 성격이 불같고 폭악하여 언제 한왕(韓王)이나 의제(義帝)와 같이 시해당할 줄 모른다는 점, 그리고 실제 진나라 군사 20만 명을 생매장했던 사례를 들어 유방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셋째, 장량은 유방군을 총지휘할 대원수 한신을 추천하여 파촉으로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유방군의 대원수로 발탁된 한신은 초한대전의 최고 군사전략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유방은 한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통일한 후 장량에 대해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라고 말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기>를 쓴 사마천은 장량에 대해 ‘하늘이 내린 참모’라 평할 정도였다. 동양에서 가장 이상적인 책략가로 장량을 꼽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조조가 순욱을 두고 “내가 그대를 얻은 것은 고조가 장자방을 얻은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후세에 장량은 최고권력자를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군신관계의 상징적 존재로서 명예를 누리고 있다. 하물며 후대에서는 '누구의 장자방'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때 '장자방'은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잘 이끄는 책사이자 스승의 전형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극존칭을 표현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재에 목말라한다. 기업에서도 원하는 인재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혹시 장자방을 기다리는 사람이라면 유방처럼 그의 능력을 알아보는 안목과 의견을 수용할 줄 아는 넓은 그릇을 갖추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장량과 같은 책사는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재목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위리. (2021). 제왕의 스승 장량. 김영문 옮김. 더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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