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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재적소 인사의 본보기

유방의 삼불여(三不如)

by 염철현

유방은 중국 동쪽의 패현(沛縣)에서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장(亭長)에서 통일왕조 한(漢)나라를 연 개국군주가 되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는가'마는 유방은 중국고대사에서 입지전적인 성공을 넘어 가히 신화를 새로 쓴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것이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죽은 뒤 어지러워진 중국을 재통일한 유방의 마음은 얼마나 감개무량했을 것인가.


유방이 개국 공신들을 모두 모아놓고 낙양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개최하였다. 유방은 공신들에게 자신이 항우를 꺾고 천하를 통일하게 된 까닭에 대해 공신들에게 마음껏 이야기해 보라고 하였다. 유방 자신의 성공요인과 항우의 실패요인을 분석해보자는 것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면서 공신들은 유방과 항우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유방의 승리 이유를 이구동성으로 늘어놓았다. 공신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유방이 직접 나선다. 당시 상황을 재현해 보자.

유방: “여러 제후와 장수들은 숨김없이 솔직히 말해보시오. 나는 어떤 이유로 천하를 얻게 되었으며, 항우는 어떤 이유로 천하를 잃은 것이오?”


공신: “폐하는 거만하여 남을 업신여기고, 항우는 어질어서 사람을 아낍니다. 그러나 폐하는 사람을 시켜서 성을 공격하고 땅을 점령하게 하면, 그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천하와 더불어 이익을 함께 하셨습니다. 하지만 항우는 어진 자를 질투하고 능력 있는 자를 시기했으며 공을 세운 자를 해치며, 지혜로운 자를 의심하였습니다. 싸워 이겨도 공을 나누지 않고, 땅을 얻어도 이익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항우가 천하를 잃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유방: “그대들은 한 가지만 알고 알고 두 가지는 알지 못한 것이다. 무릇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짓는 일은 내가 장량(張良)만 못하다. 국가를 지키고 백성을 달래며 식량공급과 운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한 일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다. 백만의 무리를 이끌고 싸우면 필승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이기는 일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출중한 인재들이다. 나는 이 세 사람을 등용할 수 있었으므로 이것이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 한 사람마저도 등용하지 못했으니이것이 그가 내게 포로가 된 까닭이다.”


유명한 삼불여,즉 '내가 장량,소하, 한신보다 못한 세 가지다.' 유방의 삼불여는 사람이 하는 일의 성패는 인재에 달려있음을 명확하게 지적한 말이다. 또한 지도자가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을 적재적소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은 물론이거니아 지도자가 인재들의 특성을 어디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공로가 컸던 공신들은 유방이 천하를 얻게된 이유에 대해 주로 지도자의 성격이나 공로에 따른 관대한 상벌과 논공행상을 지적했지만 유방의 보는 눈은 확실히 달랐다. 유방의 성공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재등용에 달렸으며 한발 더 나아가 등용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 결과였다.


유방의 삼불여는 진시황(영정)이 통일 이후 보였던 행보와는 큰 차이가 있다. 진나라 왕 영정은 중국의 영토를 최초로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아래의 내용을 발표했다. 유방처럼 허심탄허하게 이야기하자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지시했다.


"이제 이름을 바꾸지 않고서는 성공을 말할 수도 후대에 전할 수도 없으니 황제의 이름에 대하여 논하라."


마치 주관식 논술형 시험문제같다. 수백 년의 전란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왕조를 열었으면 일곱 국가의 백성을 어떻게 아우르고 통합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하면 영구적으로 평화를 이어갈 것인가 등 대승적 차원에서 통일국가 경영전략을 짜야할 시기에 자신의 명성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진시황의 우선 관심사가 자신이 이룩한 업적과 명성을 널리 오래도록 남기는 일이다 보니 진나라의 국정기조가 어디로 향하는지 불을 보듯 뻔하다. 진나라의 국력은 진시황 자신이 사후에 묻힐 황릉 축조, 아방궁 축성, 만리장성 쌓기, 곧게 뻗은 큰길(直道)과 넓은 길(馳到)를 만드는 등 초대형 토목건설 프로젝트에 쏠리면서 백성들이 부담하는 세금이 많아지고 변방 부역에 징발이 그치지 않았다. 통일이 되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올지 알고 고통을 인내했던 민심은 등을 돌렸고 전국에서 진나라에 항거하는 의병들이 들풀처럼 일어났다. 진시황이 연 통일국가 진나라가 15년밖에 지속하지 못한 핵심에는 통치자의 대승적 이념과 철학이 부재한 탓일 것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국가와 백성을 자신의 이익과 영예를 위해 절저히 악용했다. 이러니 사마천은 "진나라가 뜻밖에 멸망했다"라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진의 멸망이 '어이없다'는 것이다.


유방의 삼불여는 지도자가 어떻게 인재를 등용하고 그들을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인사가 만사(萬事)라고 하지만, 자칫 인사가 망사(亡事)가 될 수 있음이다. 무엇보다 지도자가 통 큰 리더십을 발휘하여 부하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단점을 품어 안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 태평성대를 요순(堯舜)시대라고 칭한다. 요순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결정요인은 인재등용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임금은 70년 동안 제위에 있으면서도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임금 노릇을 그만하고 싶어도 마땅한 후계자가 없어 물러날 수도 없었다. 임금의 덕목이란 임금 역할을 잘 할뿐 아니라 후계자 선택까지 잘 하는 것이다. 요임금과 신하 간에 오고간 대화 내용이다.


요임금: "귀한 친척이나 숨어 사는 자들이라도 모두 추천하라."


신하: "애처롭게 아내가 없는 자가 백성 속에 있는데 우순(虞舜)이라고 합니다."


요임금: "그는 어떤 사람인가?"


신하: "맹인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완악하고 어머니는 어리석고 아우는 오만한데 우순이 효도로써 모두 화목하게 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집안을 다스려 간악함에 이르지 않게 했습니다."


요임금: "내가 그를 시험해보리라."


순임금은 왕이 되기 전에도 효도로써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선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요지다. 요임금은 두 딸을 우순에게 시집보내고 그의 덕을 두 딸에게 살피게 했다. 요순시대에는 임금조차도 자녀에게 세습하는 것이 아니고 철저한 검증을 통해 임금 재목에 적절한 인재를 등용했다. 심지어 자기의 딸을 시집보내 사위의 됨됨이를 검증했다. 그렇게 엄격하게 검증된 인재가 태평성대를 지속 했다.


오늘날 국가경영시스템은 요순시대나 한나라 시대보다 훨씬 복잡해졌고 고도화되었다. 지도자라면 삼불여, 사불여를 하더라고 유능한 인재를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데 대부분의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이다. 희토류(稀土類)는 글자그대로 땅에서 생산되는 매우 희귀한 유형의 소재(원소)다보니 오늘날 세계가 희토류 확보에 전쟁도 불사하지만, 인재만큼 희귀한 자원이 어디있겠는가.


사마천. (2020). 신주 사마천 사기(오제본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연구실 옮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마천. (2020). 신주 사마천 사기(고조본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사기연구실 옮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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