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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과 개방성, 국가 발전의 원동력

by 염철현

기원전 237년 진나라 왕(진왕, 통일 후 진시황)이 국력을 키우며 중국 통일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진나라는 관중 지역에 대규모 농수로건설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이 토목사업을 제안한 사람은 정국(鄭國)이라는 토목전문가였다. 정국의 제안에 진왕은 눈이 번쩍 띄었다. 제안의 골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위수의 북쪽 고원을 가로지르는 대형 농수로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였다. 농수로가 완공되면 엄청난 규모의 농지에 물을 댈 수 있어 경지면적이 늘어나고 전쟁에 필요한 군량보급에 걱정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정국은 한(韓)나라에서 보낸 스파이였다. 진나라 동쪽 끝에 위치한 약소국인 한나라 조정에서는 진나라가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이는 동안에는 국력이 토목공사에 총동원되어 한나라를 침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이었다.


정국이 스파이로 밝혀지면서 진나라 조정에서는 타국에서 온 외지인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진나라 출신의 토착세력은 타국에서 초빙한 문객들을 쫓아내려 했다. 토착세력은 문객들이야말로 진나라를 멸망시키려는 세력들로부터 사주를 받고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스파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그들 모두 국경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후의 나라에서 와서 진나라를 섬기는 자들은 대체로 자기 나라의 군주를 위하여 유세하여 진나라의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시킬 뿐입니다. 청컨대 빈객들을 내쫓으십시오."


대체나 진나라에서 최고위직을 역임했던 백리해, 상앙, 장의, 범저, 여불위 등은 모두가 문객 출신이 아니었던가. 토착세력은 외지 출신에게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시쳇말로 토착세력 대 문객들 간의 밥그릇 싸움이었다. 급기야 진왕도 외지인을 추방하기로 마음먹었다. 외지인 추방 명단에는 진나라 대신들의 눈에 가시였던 승상 이사도 들어있었다. 이사는 초나라 출신으로 처음에는 여불위(呂不韋)의 문객으로 있다 진왕이 그의 견해와 재능을 높이 사서 승상으로 파격 임명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사는 진왕의 추방 명령을 받고 함양을 떠나면서 '간축객서(諫逐客書)', 즉 축객령을 바로잡기 위해 올린 서신이다. 서신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신은 땅이 넓으면 생산되는 양식이 많고, 나라가 크면 사람이 많고, 군대가 강하면 병졸이 용감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산은 한 줌의 흙더미도 사양하지 않았기에 그 높음을 이룰 수 있었고, 하해는 작은 물줄기도 가리지 않았기에 그 깊이를 이룰 수 있었으며, (...) 지금 백성을 버리면 적국을 돕는 것이고 객경을 물리치면 제후들에게 종사할 것이며, 천하의 선비들을 물러나게 하면 감히 진나라로 향하지 못하고, 발을 묶어서 진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바로 외적에게 무기를 빌려 주고, 도적에게 양식을 보내는 행동입니다. 진나라에서 나지 않는 물건이라도 보배라 할 만한 것이 많고, 진나라 출신이 아닌 인재라도 충성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지금 객경을 축출하는 것은 적국을 돕는 것이고, 백성이 줄어들고 적국의 인구가 늘어나면, 안으로는 저절로 비게 되고 밖으로는 제후들의 원망을 사게 되어 나라를 구하고 위태로움을 없애려고 해도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타국 출신으로 진나라 고위관리에 오른 객경(客鏡)이었던 이사가 진왕을 상대로 왜 나라를 개방하고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한 명문의 편지글이다. 이사의 편지를 읽은 진왕은 축객령을 취소하고 이사를 다시 불러들인다. 고대의 군주가 한번 내린 명령을 철회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때만 해도 진왕의 도량이 넓은 군주였다. 진왕은 더 나아가 한나라 스파이라고 실토했던 정국에게도 토목공사를 계속하도록 한다. 수로의 이름을 정국거(鄭國渠)로 이름 불렀다. 진왕 영정의 대단한 포용력이고 과감한 결정이었다. 진왕은 천하 제패에 도움이 된다면 외지인이든 현지인이든 오직 재주만을 보고 인재를 등용했다. 등소문의 흑묘백묘(黑猫白猫), 즉 '검정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이론의 원조다. 간축객령을 기점으로 진나라 국력은 더 강해지고 천하 통일을 위한 대장정은 더 힘을 받게 된다.


인류 역사를 보면 개방성과 다양성 기조 아래 포용적인 정책을 펼친 국가가 번영을 누렸다. 서양의 로마가 그랬고 동양의 당나라가 그랬다. 조선의 세종도 그렇게 했다. 우리 사회도 다문화사회로 진입했다. 외국인 노동자가 없으면 우리나라 산업은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지구촌 곳곳에서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다양한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한반도에 모자이크 문화가 도래했다. 사람이 온다는 것은 물건을 들여놓는 것 하고는 다르다.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의 문화가 함께 온다. 시인 정현종은 <방문객>에서처럼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은 어마어마 일이다'라고 했다. "그의 현재, 과거, 미래까지 함께 오기 때문이다." 2200년도 훨씬 지났지만 이사의 <간축객서>가 여전히 유효한 이유다.


진왕의 대담한 결정으로 완공된 대형 농수로 프로젝트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사기>에서는 "관중은 천리에 이르는 기름진 땅이 됐다. 이후부터 거의 자연 재해가 없었다. 진나라는 더욱 부강해졌다. 결과적으로 제후들을 병탄, 통일에 이르게 됐다."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했던 한나라의 전략은 오히려 진나라의 국력을 급상승시켜 이후 진나라가 중국통일을 하는데 핵심적인 국가인프라를 조성한 셈이었다.


왕리췬. (2008). 진시황 강의. 홍순도, 홍광훈 옮김. 파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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