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여 거병한 반진(反陣) 세력의 상징적 존재인 초회왕은 유방과 항우에게 약속했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먼저 도착한 사람을 관중왕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은 모든 문무백관이 모인 자리에서 진나라로 출격하기 전에 이루어진 공식 환송연에서 이루어졌다. 유방의 군사력은 항우의 군사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세였다. 항우는 관중왕은 따놓은 당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유방 진영은 가능한 피를 흘리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전략으로 진격했다. 무엇보다 장량 같은 특급참모가 있었고 유방은 참모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수용했다. 무혈입성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예상밖으로 진군 속도가 빨라졌다. 항우군은 철저히 적을 괴멸시키는 전략으로 적들에게 공포감을 조성하였지만, 백성들의 민심은 등을 돌렸고 그만큼 진격 시간도 지연됐다.
대부분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항우보다 유방이 함양에 먼저 입성했다. 전력면에서 열세인 유방은 다분히 항우를 의식하여 오해받을만한 행동을 삼갔다. 유방은 진나라 황제들이 보유한 금은보화를 저장한 창고를 봉쇄하여 도난을 예방하고, 그 자신이 호색한이었지만 궁녀를 희롱하지도 않았다. 진나라의 엄격한 법률을 폐지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불리는 세 가지 법을 집행했다. 폭정으로 시달렸던 백성들은 성군이 왔다고 환호했다.
항우에게도 유방의 소식은 전해졌다. 초회왕의 약속은 지켜질 것인가? 한마디로 장난삼아 한 말이 되고 말았다. 초회왕은 약속을 지키려고 했지만 항우의 급하고 거친 성격을 알고 있는 터에 밀고 나가기 어려웠다. 문제는 항우다. 항우가 페어플레이를 할 생각이었다면 유방을 관중왕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유방과 항우는 관중을 향해 출발할 때 맺은 의형제 사이가 아니던가. 초회왕의 관중왕 약속은 없던 것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이 문제에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항우는 처음부터 관중왕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함양 입성 문제는 형식적인 통과의례로 생각했을 것이다.
항우는 초회왕을 무시하고 논공행상을 한다. 왕은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고, 전쟁터의 항우가 실세다. 유방에 대한 많은 백성들의 지지와 무시하지 못할 군사력을 의식한 항우는 유방을 한 왕(漢王)으로 봉하고 서쪽 파군, 촉군, 한중군을 다스리도록 한다. 당시 파촉은 첩첩산중의 오지로 유배지로 잘 알려졌다. 항우는 유방을 오지에 처박혀놓고 아예 꼼짝달싹 못하도록 만들려고 했다. 유방의 책사 역이기(역생)는 장량의 의견이라며 유방에게 파촉으로 갈 때의 세 가지 이로움과 함양에 계속 머물러 있을 때의 세 가지 해로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의 SWOT 분석이다. 이로움이란, 첫째, 파촉은 왕래하기가 험난한 곳이라 그곳에서 무슨 일을 꾸며도 적이 알지 못한다. 둘째, 지세가 험난한 곳에서 군마를 조련하면 전투력이 강해질 것이다. 셋째, 파촉에서 관중으로 쳐 나올 경우에 군사들은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기쁨으로 사기가 높아질 것이다. 해로움이란, 첫째, 함양은 한(韓), 위(魏)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군사기밀이 외국에 새어나가게 된다. 둘째, 군사를 일으켜 항우를 치려할 때 우리의 실력을 미리 알고 있다가 우리의 허점을 찔러올 것이다. 셋째, 백성들은 강한 자의 편에 서기 때문에 우리보다는 항우 편에 가담하려고 할 것이다. 유방의 특급참모 장량의 기재(奇才)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파촉으로 향하는 유방의 마음은 항우에 대한 배신감, 분노감, 억울함, 좌절감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항우와 의형제란 말은 허영과 위선으로 포장된 말장난에 불과했고 이제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유방은 파촉으로 행군하면서 장량의 계책에 따라 잔도(棧道)를 불태워버린다. 항우에게는 파촉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제스처를 보여주면서 항우에게 유방이란 존재를 잊어버리는 효과를 노렸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권토중래(捲土重來), 즉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함양으로 진격하여 항우에게 원수를 갚고 천하를 거머쥘 것인가?
유방의 권토중래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덕치(德治) 전략이다. 덕을 베풀어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다. 유방은 항우처럼 싸움만으로 세상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러한 신념은 함양에 진격할 때 유방이 인의군자라는 소문만 듣고서도 장수들과 백성들이 유방에게 귀의했던 경험으로 더 강화되었다. 유방이 지닌 특별한 능력은 신분이나 지위를 떠나 주변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다. 이는 유방이 평민 출신이고 고향에서 협객 생활을 할 때 부하들을 거느리면서 배운 일종의 리더십도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유방은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방이 한나라 황제에 오른 후 유방과 한신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유방: "장수들마다 능력이 달라 어떤 장수는 1만 병사를 거느릴 수 있고, 어떤 장수는 백만 대군도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얼마의 병사를 거느릴 수 있습니까?”
한신: “폐하께서는 10만 정도의 군사는 충분히 거느릴 수 있을 것입니다”
유방: “10만이라... 그렇다면 그대는 얼마나 거느릴 수 있습니까?”
한신: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유방: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 어찌하여 10만밖에 거느릴 수 없는 나의 부하가 되었습니까?”
한신: “폐하께서는 많은 병사를 거느릴 수 없지만, 많은 장수들을 잘 거느리십니다. 반면, 신은 많은 병사를 거느릴 수는 있지만, 많은 장수를 거느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폐하에게 부림을 당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유방: "그대도 많은 장수를 거느리면 되지 않습니까?"
한신:"그런한 능력은 하늘이 주는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폐하의 신하가 된 까닭입니다."
한신이 유방을 한껏 띄우는 거처럼 보이지만, 한신은 유방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유방이야말로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장수 중의 장수다. 유방은 한신의 말에 속으로 깜짝 놀라며 한신을 다시 보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둘째, 능력 위주의 인재등용 전략이다. 유방은 거병 이후 철저히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다. 토포악발(吐哺握髮)이라는 고사가 있다. 씹던 음식도 토하고 감고 있던 머리칼을 움켜쥐고 귀한 인재를 얻기 위해 극진한 예우를 갖춘다는 뜻이다. 유방은 거의 토포악발을 하며 능력 있는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했다. 유방의 인재풀은 고향 패현 출신에다 유방에게 귀의한 사람들이다. 유방의 고향 친구는 유방이 거병할 때부터 줄곧 함께 해왔는데 소하, 번쾌, 하후영, 조참, 주발, 관영, 노관 등이 있다. 이후 유방에게 귀의한 인재들은 장량, 진평, 역이기, 한신, 영포 등 책사와 장수들이 줄을 이었다. 유방과 항우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유방에게 귀의한 인재들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지 않았지만, 항우를 위해 일하는 인재들은 유방 진영으로 귀의하거나 아예 초야에 묻혀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방 진영의 대원수 한신과 특급 참모 진평은 항우 진영에서 유방에게 귀의한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양금택목ㅇ의 진리다.
유방이 황제 자리에 오른 후 소하, 장량, 한신의 능력과 비교했을 때 세 가지 능력면에서 부족하였다는 고백, 즉 삼불여(三不如) 역시 유방이 능력 위주 인재등용 전략에서 나타난 결과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으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유방은 부하들의 장단점을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한 결과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경청과 수용 전략이다. 유방은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일리가 있다면 과감히 수용하여 실행에 옮겼다. 항우는 범증을 아보(亞父)라 부르며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존경과 예우로 대했지만, 범증의 계략을 따르지 않아 실패를 본 경우가 빈번했다. 기량에 있어 장량못지 않았던 범증은 제대로 지략을 펼쳐보지 못한 채 유방 측의 반간계에 속아 항우에 의해 내쳐졌다. 유방의 책사들이 항우의 단순하고 급한 성격을 잘 알고 있기에 항우를 속이는 것은 쉬웠다. 유방이 항우를 얼마나 빈번하게 속였는가는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유방처럼 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참모들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고 일리가 있으면 따르면 되는 것을, 항우는 나름 전쟁에 대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보니 참모들의 의견을 잘 따르지 않아 왕왕 실패하였다. 유방은 참모들의 계략을 믿고 신뢰했다. 그런 유방도 대원수 한신에 대한 시기, 질투로 딱 한번 참모들의 의견을 듣지 않았다. 유방은 한신의 위세가 자신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을 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팽성에서 항우와 싸워 대패하고 말았다. 그때도 유방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한신에게 다시 군권을 맡긴다. 벌어진 사태를 쉽게 수습하는 넉살 좋은 리더다.
경청과 수용에 있어 유방만한 인물을 찾기 어렵다는 방증이 있다. 한나라 황제 유방은 도읍을 낙양으로 정할 생각이었다. 제나라 출신의 사졸 중에 누경(婁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유방이 도읍지를 낙양으로 정한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를 만나러 갔다. 우여곡절 끝에 황제 앞에 선 누경은 낙양보다는 장안(함양)을 도읍지로 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낙양은 견고하지만 그 중심 지역이 수백 리에 불과할 정도로 협소합니다. 또한 땅은 척박하고 주위에 요새가 없어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우며 방어하기도 어렵습니다. 폐하께서는 항우의 멸망을 벌써 잊으셨습니까? 항우는 범증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관중을 버리고 팽성에 도읍하였습니다. 항우는 이미 그때 천하를 상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낙양에 도읍을 정하는 것은 항우의 전철을 밟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유방은 일개 사졸의 논리정연한 의견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장량의 의견을 물어보고 누경의 말을 수용했다. 유방은 현대 사회의 지도자에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경청과 수용 능력을 지닌 군주였다.
유방은 덕을 베풀어 널리 민심을 얻으며 능력만 보고 다양한 인재를 받아들이고 그 인재들의 말을 경청하고 수용했다. 그렇게 힘을 키운 유방이 파촉을 넘어 항우에게 권토중래할 수 있었다. 유방과 항우의 초한쟁패는 인재의 등용과 인재의 활용에서 판가름 났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결국 유방과 항우는 사람의 유형 혹은 무형의 자질을 담는 그릇의 크기에서 차이가 났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람(인재)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그 지도자가 최종 승자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