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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우월의식은 죽음을 자초한다

항우

by 염철현

기원전 203년, 유방과 항우는 광무산에서 대치하다 종전협약을 체결한다. 천하를 양분하는 광무산 협약이다. 홍구(鴻溝)를 경계로 서쪽은 유방이 다스리고, 동쪽은 항우가 다스리기로 했다. 유방도 항우도 오랜 전쟁으로 지쳐있었다. 특히 항우군은 양식도 떨어졌다. 항우는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거지 팽성으로 돌아가길 바랐는데, 마침 유방 측에서 종전 제의를 해왔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즉 항우는 먼저 나서서 종전을 하자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항우의 본래 스타일이라면 유방과의 타협이나 협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항우가 종전협약에 합의한 것은 그만큼 초나라군의 상황이 최악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세고 우월감이 높은 항우가 유방과 종전협약을 체결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광무산 협약은 기원전 205년 가을에 시작되어 기원전 204년 여름까지 계속된 형양성 전투와는 정반대의 경우다. 그때 형양성에서 장기 농성 중이던 유방군은 항우군에 포위되었고 양식마저 떨어져 군사들이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방은 항우에게 화전(和戰)의 손길을 내민다. 이때만해도 항우의 군사 범증이 항우를 돕고 있었다. 항우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 유방의 화전 요청을 받아드리려고 했지만, 유방의 속마음을 훤히 드러다보고 있는 범증의 반대로 화전은 무산됐다. 유방은 화전이 성사되지 않게 되자 이번엔 반간계를 써 당대 최고의 전략가 범증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범증이 없는 항우군은 유방군의 치고 빠지는 화전양면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초한쟁패기에 항우가 범증을 내친 것은 항우의 치명적 실수가 되고 말았다.


이제 항우군은 종전협약에 따라 동쪽으로 철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 진영에서 배신과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유방도 협약에 따라 서쪽으로 군사를 물리려고 하는데 군사(軍師) 장량의 생각은 달랐다. 장량은 항우군이 철군하는 지금이 항우군을 완전히 절멸시킬 수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만약 항우가 본거지 팽성으로 철수한 뒤 재기할 경우에는 영원히 항우를 물리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협약서의 먹물도 마르지 않아 협약을 뒤집어 비난을 받겠지만 이참에 항우의 뒤통수를 쳐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 통일을 해야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불태웠다. 신의를 잃고 욕을 먹는 것은 잠시지만, 실리를 챙기것은 영원하다고 하던가.


장량은 유방이 항우를 배신하는 명분을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란 이상한 동물이라서 강한 입장에 놓였을 때는 약속을 잘 지킵니다. 그러나 약자의 처지에 놓이게 되면 때때로 약속을 어기는 행동을 자행합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는 강자의 허(虛)를 찌를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량의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다. 장량은 그 당시 유방과 항우의 전력을 놓고 유방군이 약자이고 항우군이 강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유방군은 최상의 전력이었고 항우군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는 전략가들이 명분을 합리화하기 위한 상투적인 수법이라고 해야하까. 장량은 최상의 전력을 보유한 유방군이 이번 기회에 항우군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장량의 판단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유방군은 총력전을 펼쳐 항우군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항우는 유방을 상대로 수십 번도 더 많은 승리를 거뒀지만, 유방이 해하전투에서 항우에게 먹인 한방이 최후의 결정타가 되었다. 백만 명에 이르는 유방군이 몇 겹으로 항우군을 포위하였다. 군량이 떨어진 항우군은 싸울 의지도 힘도 없었다. 이틈을 타 유방 진영에서 항우군을 심리적으로 교란시켰다. 유방진영에서는 탈영한 초나라 군사들에게 노래를 부르게 했고, 노랫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항우군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신세가 됐다. 초나라군은 고향과 가족 생각으로 기세가 꺾이고 삽시간에 탈영병의 숫자는 늘어났다. 심지어 항우의 숙부인 항백과 장수 종리매, 계포 등도 탈영했다. 초나라군에는 몇 명의 장수와 800여 명의 군사만이 남았다. 초나라 군사들의 폐부에 파고드는 슬프고 애절한 망향가(望鄕歌)의 노랫가락을 들어보자.


가을은 깊어 들에 서리 날리고

높은 하늘엔 외기러기 슬피 울며 날아가네

창 짚고 땅에 서니 밤과 낮이 괴로워라

모래 언덕엔 백골만 가득하네.

집 떠난 지 심여 년 어머니는 무사할까

사래 긴 밭 누가 갈며, 잘 익은 술 누구와 마시는고.

인생이 무엇인가 부모처자 내버리고

고향 산천 등지고 죽을 땅 헤매느뇨.

적박한 이 산속에 밝은 달 바라보니

나그네 길 오래기로 어찌 고향 잊을쏜가.


이 노래를 들은 초나라 군사들이 동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나라 군에 포위된 채 먹지 못해 창 잡을 힘도 없고 패색은 짙어 가는데 진영에 남아 버티는 병사들이 이상할 정도였다.


우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의 항우도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자 "한나라군이 이미 초나라를 손에 넣었던 말인가? 어찌 이리도 초나라 사람들이 많단 말인가”라고 반응했다.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반응이다. 항우가 술을 마시며 침통한 심경으로 불렀던 노래가 전해진다. <해하가(垓下歌)>라고 한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건만

시운이 불리하고 추(騅) 또한 달리려 하지 않는다.

추가 달리려 하지 않으니 이를 어쩔거나?

우(虞)여, 우여! 그대는 또 어쩔거나?


항우는 마지막 순간에 관심사는 자신의 압도적인 힘과 기개 그리고 준마 추와 아내 우희였다. 그러면서 항우는 "지난 8년간 칠십 번의 전투에서 모두 이겨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곤궁한 처지에 몰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싸움을 못한 죄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범증을 내쳐 죽게 한 일을 후회하며 눈물을 훔쳤다. 일찍이 범증은 항우에게 여러 차례 "유방은 속으로 야망을 숨긴 음흉한 자이니 일찌감치 죽여 없애지 않으면 뒷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항우는 자신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것은 자신 탓이 아니라 하늘이 자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항우는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내려놓치도 승복하지도 않았다. <사기>에서는 항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을 했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것을 스승 삼지 아니하였으며, 패왕의 공업(功業, 큰 공로가 있는 사업)이라는 명분하에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다 끝내 5년 만에 나라를 망치고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지 않았으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하늘이 나를 망하려고 하는 것이지, 결코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한 죄가 아니다'라는 말로 핑계를 삼았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하늘 아래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은 불완전을 전제로 한다. 항우가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백전백승을 하였지만, 전쟁은 혼자만의 기예와 용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힘으로 산을 뽑고 세상을 뒤엎을만한 기개를 가진 사람이라도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의식과 자만심에 갇히게 되면 사면초가의 고립무원에 놓이게 된다. 항우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 우월감이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영웅의 자질을 가진 사람은 겸양, 인정, 관대함과 같은 도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나게 한다. 후한 시대 제갈량은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일을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이다"라는 좌우명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고 한다. 인간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겸양과 수용의 자세가 얼마나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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