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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니 Apr 21. 2024

마드리드에서 들었던 가끔은 혼자보다 둘이 좋다는 생각

40일간의 배낭여행 열두 번째 행선지

1. 아침 비행기를 타러 이른 새벽 포르투 숙소에서 나왔다. 40일간의 대장정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어느새 마지막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피렌체를 여행하며 만난 사람 중 하나인 동갑내기 이탈리안 친구 J에게 여행 내내 조금씩 연락을 주고받다가, 포르투에 있을 때 그 친구를 슬쩍 떠 봤다. 나 이번에 마드리드를 마지막으로 한국 돌아가. 앞으로 1-2년 동안 유럽에 올 계획은 없어. 


J는 비행기표를 끊었다. 계획에 없던 3일짜리 룸메가 생겼다,


그 친구도 마드리드가 처음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하고많은 사람들 중에 완전히 ‘혼자’ 여행 온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는 않았다. 다들 친구와, 피앙세와, 사촌언니와. 아시안 20대 여자애 혼자 여행하고 있다고 하면 다들 용감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지만 그때마다 머쓱함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용감한 게 아니라 혼자가 더 편하다고 생각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에서 여러 사람과 방을 셰어 하는 것과 친구와 여행하며 둘 또는 셋이서 함께 지내는 것은 굉장히 다르다. 전자는 완벽한 타인이기 때문에 서로를 침범해서도 안되고 따라서 ‘우리가 여기서 다 같이 잘 지내려면 선은 넘지 말자’라는 암묵적인 약속이 깍듯하게 깔려있지만 , 친구와의 여행에선 서로의 생활반경이 완벽하게 겹쳐진다. 함께 사는 경험을 넘어서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함께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많은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고, 내가 몰랐던 친구의 면면을 보게 될 수도 있다. 타인과 함께하는 여행에서 나의 포커스는 ‘장소’가 아닌 ‘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장기 여행에선 혼자 다니는 게 판단했다. 마음껏 이기적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포르투에서의 친구들과 했던 동거도 제법 소모적이었기 때문에 역시 여행은 혼자가 편하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굳혀지고 있었다. 

숙소 앞 골목

J와의 시간은 이런 내 생각을 다시금 바꿔주었다. 마드리드에서의 3일 동안 우리는 관광객보다는 72시간짜리 거주민에 가까웠다. 우리는 마치 언제라도 다시 올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박물관? 피곤한데 그냥 집 앞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산책이나 가자. 저 시장에는 관광객이 많이 몰린다는데 그냥 시내 애플스토어나 가볼래? 저녁은 뭐 먹을까? 아메리칸 다이너? (웃음) 


우리의 몇 안 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여행할 때 유독 거세지는 누가 하라고 하면 괜히 하기 싫어지는 청개구리 심보였다. 때문에 계획이라도 한 듯이 ‘마드리드에 간다면 꼭 가봐야 할 명소’들을 기막히게 비껴나갔다. 정말 신기한 일은, 누군가 내게 여행한 도시 중 제일 좋았던 곳들 세 개만 꼽으라고 한다면 언제나 마드리드를 넣게 된다는 것이다. 마드리드 시내 한복판을 걸어 다니며 마치 예전에 살았던 동네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바르셀로나가 여행하기 좋다면, 마드리드는 살기 좋은 도시였다. 이런 나의 생각을 J도 공감했고, 우리는 걸어 다니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서로 살아온 삶의 궤적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같은 걸 봐도 생각이 달랐고, 의견은 토론으로 이어졌고, 한창 이야기하다 목이 마르면 까르푸나 야오야오에 들어가 오렌지 주스나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J는 이탈리안답게 오후엔 우유 들어간 커피를 먹지 않았고, 나는 비웃으며 보란 듯이 더블 바닐라 라떼를 시켜주었다. 그냥 그런 유치한 것들이 시간이 지난 지금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다.


2. 마드리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 중 하나는 마드리드 왕궁에 놀러 간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드리드 왕궁 ‘앞마당’이라고 해야겠다. 어느 오후, 그래도 왕궁은 꼭 가보고 싶어 느지막이 외출한 그날 하필 왕궁이 평소보다 조금 일찍 문을 닫았고, 화려한 백옥색의 건물은 철창 사이로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와중에 왕궁 앞 널찍한 공간에서 누군가는 스케이트를 탔고, 누군가는 데이트를 하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평일 오후 5시에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여유가 꿈같이 느껴졌다. 여행지를 한국과 비교대조 시키는 행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풍경을 한국에선 쉽게 그리기 어려운데 여기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살 수가 있지. 억울하고 부러운 맘까지 들었다. 

마드리드 왕궁 맞은편

그곳의 여유를 빌려 우리도 같이 늘어져있기로 했다. 철창에 기대어 J와 나는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따위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J는 아마추어 가수였고, 나는 오래 꿈꾸던 진로를 접고 방황 중이었다. 털어놓고 보니 고민의 결이 비슷했다. 나와 열네 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어떤 스물하나도 종종 내일이 막막하게 느껴지는구나 싶어 조금 덜 외로워졌다. 


저녁을 먹고 공원을 걷는데 저 멀리 높은 빌딩 위 번쩍번쩍 빛나는 루프탑이 보였다. 우와, 신기하다. 파티하나 보네, 하긴 오늘 금요일이니까. 하고 계속 걸으려는데 J가 내게 말했다. 우리 저기 가자.


가난한 학생 둘이었고 더군다나 나는 이곳이 마지막 여행지 었기 때문에 가진 돈도 거의 다 쓴 상태였다. 긴축재정에 한창 들어가 있던 나는 그런 친구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반문했지만, 우리가 언제 다시 같이 마드리드에 와보겠어 하는 친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 호텔은 마드리드 시내에서 거의 가장 높은 호텔이었기 때문에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꼭대기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비용까지 따로 내고 올라간 루프탑 바는 예상보다 더 좋았던 기억이 난다. 갖춰 입은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며, 칵테일은 맛있었다. 하지만 깜짝 루프탑 바를 포함해 마드리드에서 가장 인상깊고 감사했던 것은, 혼자라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경험을 둘이었기 때문에 했다는 것이었다. 함께 여행의 묘미를 여행 막바지에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제야 기나긴 열두 편의 여행기를 마무리한다. 유럽 3국을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돌아다니며 비로소 세상과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행성과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맞닿아 있구나, 여기에 내가 발 붙이고 살아가고 있구나를 몸소 체감했다.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지구 반대편에서의 삶은 어떨지. 수도권 계획도시에서 나고 자라 모두가 비슷한 꿈을 비슷한 방식으로 꿨다. 기가막히게 안정적이었고, 다름은 곧 눈치였다. 정도껏 하고 눈치봐서 다시 트랙으로 들어와, 그런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이 드넓은 지구가 얼마나 거대한지, 그 안에 얼마나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있는지 나와서 직접 보았다. 


전엔 사는게 마라톤같이 느껴졌는데, 보고온 세상은 거대한 공원에 더 가까웠다. 그곳에선 트랙 위에서 마라톤을 하는 사람도 있고, 단거리 경주를 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고, 트랙 옆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도 있고, 그 옆에서 레모네이드를 팔거나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 중 오답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옳고 그름 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삶도 그렇다.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여전히 안부를 주고받고, 늘 내 기분을 최상으로 만들어주던 햇살과 오렌지나무는 여전히 선명하다. 푸릇한 잔디밭에서 뒹굴던 오후의 여유를 느껴봤기에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 삶을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하루하루로 만들어가기 위해 기꺼이 노력해보고 싶어졌다. 행복이 꼭 바깥에 있는 것만은 아니겠지만, 내가 추구하는 삶이 저 멀리 타국에 있다면 언제든지 나갈 용기도 덤으로 얻었다. 그렇게 나는 40일간의 여행 끝에 서울에 돌아오게 되었다. 


世界那么大,我想去看看。세상이 그렇게 넓다는데, 제가 한 번 가보죠.


한동안 인터넷에서 화제였던 중국인의 사직서 문구처럼, 

40일동안 엿보고 온 세상은 상상보다 더 넓었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이 떠나는 게 하나도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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