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일간의 배낭여행 아홉 번째 행선지
1. 등에 맨 커다란 배낭 외에도 두툼한 에코백과 힙색을 양손 가득 안고 올라탄 버스 안에선 나도 모르는 사이 깜빡 잠이 들었다. 번쩍 잠에서 깨자마자 코를 찌르는 달큼한 초콜릿 냄새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출발 전 버스터미널에서 산 3개입 초콜릿바가 떠올랐다. 설마 하며 열어본 에코백은 녹은 초콜릿으로 이미 범벅이 되어있었다. 필름카메라, 1월부터 열심히 적어온 다이어리, 아끼는 스크런치 모두 못쓰게 되어버렸을뿐더러 버스 안에 초콜릿 냄새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장실이 있는 2층 버스라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갔으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 대충 망가진 물건들의 겉만 닦고 남은 두 시간을 곤욕 속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세비야 도착 전 액땜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해프닝은 끝나지 않았다. 세비야에서 가장 유명한 호스텔 중 하나를 예약했는데, 깔끔하고 신식인 내부와 달리 숙소 앞 골목엔 바퀴벌레 수십 마리가 죽어있었다. 기겁하며 뛰어들어갔는데, 생각해 보면 그때 이상한 낌새를 짐작하고 나왔어야 했으나 엉덩이가 무거워 하루를 묵었고, 다음날 등이 가려워서 옷을 들춰보니 아니나 다를까 베드버그에 물린 자국이 남아있었다.
따지려고 내려간 로비에서는 벌레를 직접 잡아와 보여주지 않으면 호스텔 측 과실로 인정할 수 없다며, 오히려 나를 거짓말쟁이 취급했고 급기야 매니저를 대동해 내 방에 들어와 우리 책임이 아니라며 윽박질렀다. 여행 중 처음 겪는 공격적 돌발생활에 너무 억울해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나는 솔로 트래블러. 책임도 대처도 오롯이 내 몫이기 때문에 쉽게 무턱대고 울어버릴 수는 없었다. 결국 세탁비도 못주겠다는 호스텔의 막무가내 대처에 너무 화가 나 (배드버그에 물린 자국이 발견되면 가지고 있는 옷과 천 소재 물건을 모두 고온세탁 후 햇빛에 말려야 한다) 곧장 짐을 싸 나왔고, 코인세탁소에 들려 모든 옷가지를 쑤셔 넣은 뒤 당일 예약이 가능한 에어비앤비를 알아봤다. 누군가와 방을 쉐어하기엔 내 사회성이 이미 바닥난 뒤였다.
유럽여행 후기글을 읽다 보면 배드버그에 물렸다는 글이 심심찮게 보인다. 배드버그라고 하니 생소해 보이지만, 우리나라 말로 하면 빈대이다. 21세기에 빈대라니 무슨 말인가 싶지만 원목 가구와 카펫 사용이 흔한 유럽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 중 하나이다. 최악의 경우 여행을 지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두드러기가 올라오거나 간지럼증이 심해질 수 있어 로마에서부터 베드버그 스프레이를 늘 들고 다니며 호스텔을 전진할 때마다 침대에 도배를 했었는데, 나름대로 예방을 했음에도 예상 밖의 상황에 머리가 새하얘졌다. 약국에 들어가 울망울망한 얼굴로 물린 자국을 보여주며 약을 달라고 했는데, 바르는 연고와 스프레이를 건네주셨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약이 잘 들어 간지럼증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흉터도 오래가지 않았지만, 거의 반나절을 호스텔과의 기싸움, 벌레와의 사투, 그리고 스트레스와 걱정으로 지새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저 속상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작은 일로 여행을, 하루의 기분을 망쳐버릴 순 없었다. 새로 옮긴 숙소에 짐을 두고 곧장 밖으로 나가 걸었다. 초콜릿 패스츄리를 하나 사 먹고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타오르는 햇살 아래서 한참을 걷다 보니 꽁꽁 얼어있던 마음이 금세 녹아내렸다. 모 가수가 했던 말처럼, 지금 이 기분 영원하지 않고 내가 5분 안에 바꿀 수 있다.
2. 이 도시가 초반에 나에게 유독 매정하게 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스페인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초콜릿으로 범벅이 된 가방을 세면대에서 대강 빨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숙소를 나섰다. 다행히 세비야는 그리 크지 않았고, 세비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스페인광장까지는 도보로 이동이 가능한 거리였다. 사실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대략적인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기독교 교리에 따라 광장을 중심으로 가운데 교회가 있고, 주거지와 편의시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가며 비슷한 듯 다른 수많은 광장들을 지나왔다. 그런데 이곳 스페인 광장만큼 나에게 큰 감흥을 준 광장은 이제까지 없었다.
시간은 오후 8시를 어물쩍 지나가고 있었다. 5월의 스페인은 10시까지 해가 떠 있었기에 내가 도착했을 때쯤 광장의 모든 것들이 주황빛에 잠기는 중이었다. 작은 연못을 둘러싼 푸른 아줄레주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주르륵 늘어선 가로수의 나뭇잎은 지나치게 초록이며, 쨍한 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의 발걸음은 옷차림만큼이나 가볍다.
이윽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바이올린 선율이 들렸고 나는 홀린 듯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왕궁의 메인 홀 한가운데서, 계단 중간쯤 바이올린을 켜는 한 남자가 있었다. 멜로디는 높은 층고를 타고 퍼지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잠시 붙잡기 충분했다. 그가 연주하던 크리스티나 페리의 a thousand year이 울려퍼지던 그 순간, 이 광장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렌지빛 마법은 바이올린 선율이 멈춘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