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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파니 Apr 07. 2024

리스본 호스텔에서의 닷새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

40일간의 배낭여행 열 번째 행선지

세비야에서의 이런저런 일들을 겪고 나니 리스본으로 떠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국경을 건너는데 버스를 이용하는 일은 이곳 유럽에선 흔한 일이니 놀라지 말도록 하자. 리스본까지 버스로  5시간. 중간에  휴게소에 들러 수플레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요 며칠간 계속 긴장상태였기에 모르는 사람과의 접촉이 썩 내키지 않았는데,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직원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폭신한 팬케이크만큼이나 몽글한 타인의  친절함에 마음이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달콤퐁신 딸기수플레팬케이크

“그라시아스! 오 아니 오브리가다!”


마치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처럼, 비슷하지만 다른 나라로의 새로운 여정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1. 박물관이나 관광지가 다른 도시들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이곳저곳 걸어 다니며 골목유람을 즐기는 유유자적 여행자라면 포르투갈이 제격이다. 골목골목 돌길 위로는 트램이 지나다니고, 멀지 않은 곳에 푸르른 바다가 보이는 풍경은 핀터레스트에 ‘european summer’을 검색했을 때 상단에 뜨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더군다나 리스본은 포르투갈 중에서도 유독 배낭여행자들이 많은 도시로 꼽힌다. 싸고 좋은 호스텔들이 도심에 넘치고, 대중교통이 매우 잘 되어있어 젊은 유동인구가 한가득이다. 번쩍번쩍한 빌딩이나 최신 기술이 들어선 도시는 아니지만 곳곳의 힙한 오브제에 그라피티가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유다. 한국 여행자들의 블로그에서도 몇 번 봤던 리스본의 한 소셜호스텔을 예약했다.


배낭여행을 하며 수많은 호스텔을 이용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곳은 그 어느 호스텔보다 활발했다. 체크인할 때 처음 공간을 구경하며 든 생각은, 호스텔보단 셰어하우스에 가깝다는 것. 채광 좋은 넓은 공용 공간에는 사람들이 늘 바글바글 모여 보드게임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몇몇은 부엌에선 간식을 만들어 먹고 각자 사용한 식기를 설거지해 가지런히 두었다. 매니저를 따라 올라간 위층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고, 그중 6인 도미토리 실에 배정되었다. 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오늘 펍크롤에 꼭 오라며 매니저는 가볍게 윙크를 던지고 유유히 떠났다.

호스텔 커먼룸의 말도 안되는 뷰!

리스본에서의 첫날밤, 어쩐지 금세 동난 소셜 배터리 때문에 혼자 호스텔에 일찍 돌아와 버렸다. 새벽 세시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차나 한잔 마시려고 내려간 공용공간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시원시원한 미소가 매력적이던 그 친구의 이름은 나와 같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찾은 중국계 캐나다인 스테파니는 내일부터 자기 친구들과 같이 다니자고 선뜻 말해주었다. 리스본에서의 닷새는 그 뒤로 쭉 좋은 친구들과 함께였다. 한국계 미국인 J, 필리핀계 프랑스인 C 모두 스테파니가 이 호스텔에서 만난 아시아계 third culture kid 친구들이었다. 펍크롤이나 데이투어를 가서 아시안을 본 적이 많이 없는데, 이 친구들한테는 내 백그라운드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해시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해받는 기분이 좋았다. 아시안 가정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서들은 금세 우리를 하나로 묶어줬다.

어느 날의 pizza night. 사랑하는 친구들

나와 그 친구들은 비슷하다가도 달랐다. 엄한 부모님,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집안 분위기, 아시안 음식에 대한 그리움을 공유하다가도 꼭 대학을 가지 않고 커뮤니티 칼리지 졸업 후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한다던가, 나이에 묶여있지 않고 여행을 다니며 경험을 쌓는다던가 하는 것은 분명 한국-한국인에게는 흔하지 않은 삶의 궤도라 흥미로웠다. 동시에 나의 선택지가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의 방향을 한번 더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늘어난 선택지들은 내 숨통을 조금이나마 트여줬다.


아시안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접한 것은 리스본에서의 경험 중 단연 가장 값졌다. 그들이 느끼는 정체성 혼란-분명히 영어가 모국어인 국가에서 나고 자라 영어를 씀에도 종종 겪는 마이크로어그레션, ‘아시안-여성-헤테로’을 향한 정형화된 스테레오타입들, 이민 1세대 부모님에게는 평생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개인의 고민들-은 당시에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과도 맞닿아 있는 것들이었다. 물론 그들과 달리 난 인종적 소수자성을 겪으며 살아온 것이 아니지만,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해주는 이야기는 나에게 일종의 안심이었다. 이방인은 국적이 아닌 감각이라는, 나고 자란 곳이 날 불편하게 하더라도 괜찮다는. 그렇기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 간의 연대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말하는 친구들에 긴 고민에도 해답의 실마리가 비치는 기분이었다.


한국에선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이렇게까지 말이 통하지 않을 수 있나 싶은 순간들이 왜이리 많은지, 여기저기 둘러봐도 온통 같은 피부색의 사람들뿐인데 왜 이곳은 날 더 외롭게 만드는지 종종 생각했었다. 다른 언어로 대화를 해도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미국에서 지내면서, 유럽여행을 하면서 해봤기에 이제 언어나 피부색의 일치가 꼭 이해와 소통으로 이어질 수도, 이어질 필요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 많은 사람들에게 포르투갈이 인생 여행지로 꼽히는 것을 알지만, 슬프게도 나에게 리스본과 포르투는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밥먹듯이 당한 캣콜링은 차치하고서라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리가 너무너무 더럽기 때문이었다. 뉴욕에 몇 번이나 방문해 지하철을 탈 때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라고 생각했고 파리의 길거리도 악명이 너무 부풀려졌다고 생각하는 나였는데, 리스본의 거리는 (당시 축제기간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파리와 뉴욕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정말 너무너무 더러웠다. 더운 날씨 탓에 샌들을 신고 다녔는데, 맨살에 쓰레기가 닿을까 봐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걸어 다니는 건 기본, 무더위와 쓰레기가 만나자 냄새가 장난 아니었다. 풍경이고 뭐고 지금 거리가 너무 더럽다니까요?


그래서 나에게 포르투갈 여행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들과의 시간이 거의 전부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어디를 가든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는 점에서 실패한 여행지는 절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많은 추억들이 있지만 재미있는 일을 한 가지 꼽자면, 여행 3일 차에 우리 방에 A라는 새 여행자가 들어왔다. LA에 살면서 할리우드 비디오그래퍼로 일하는 A는 나와 취향이나 관심사 같은 것들이 많이 겹쳤고, 둘 다 방송사 인턴 시절에 임금체불 당했던 경험이 있어 실컷 보스 욕을 하며 금세 친해졌다. (전 세계 어딜 가도 쇼비즈니스 업계는 다 비슷한 걸까?) 그렇게 아나와 자연스럽게 하루를 같이 보내게 됐고, 저녁에 J 그리고 이 호스텔 최고 인싸 P와 파티를 가게 됐다. 다들 모여있는 술집에 들어가려다 사람이 너무 많아 급격히 질려버린 우리의 눈에 바로 옆 골목의 팬시한 와인바가 들어왔고, P가 장난 가득한 얼굴로 먼저 쏙 들어가 버렸다. 유럽에선 그런 공간에 보통 드레스코드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서로를 쳐다봤다. 미니스커트에 호피 무늬 드레스 그리고 짧은 청바지에 형광귀걸이. 과연 우리가 들어갈 수나 있을까 생각하며 하나둘 P를 따라 들어갔다. 

즉흥적으로 들어간 파두바에서 보낸 환상적인 시간

과연 내부는 드레스와 힐 턱시도를 갖춰 입은 나이 지긋한 신사숙녀들이 가득했다. 알고 보니 이 바는 포르투갈 전통 음악 ‘파두’를 공연하는 파두 바였다. 포르투갈에 온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직 전통음악도 모르는 게 말이 되냐며 P가 냅다 와인을 보틀로 시켰다. 중년의 서버 역시 우리를 손자 손녀 뻘로 생각하셨는지 아주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멍해주셨다. 곧이어 이어지는 파두 공연은 정말이지 너무 좋았지만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우리는 눈을 마주칠 때마다 웃음이 쏟아질 뻔한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파티 대신 선택한 파두바의 낭만적인 어느 밤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새벽에 나와 헤스타우라도레스 광장에서 먹은 빅맥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한 부분이 되어주었다. 내일의 걱정 같은 건 잠시 접어두고 그 순간에 충실했던 우리의 여름이 리스본에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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