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행복하니 그걸로 되었다.
뭔가 시작하기 전에 장비부터 잔뜩 사들이는 사람이 있죠? 그게 바로 나예요.
요 몇 달 사이에 만년필과 등산 관련 물건들을 도른자처럼 질러대었다. 만년필은 살짝 소강상태인데(지를 만큼 질러서 더 지를 게 딱히 없음) 등산은 이제 막 시작인 것 같아서 앞날이 캄캄하다. 누가 등산이 돈 별로 안 드는 취미라고 하였나!
물론 집 근처 산만 주구장창 다니면 돈 들 일이 없다. 등산 관련 카페에서는 이들을 ‘동백이’라고 부르더라. 동네 뒷산만 백 번씩 다닌다고.
나도 시작은 동백이었건만. 등산 매니아 친구가 살짝 끌어줬을 뿐인데 나 혼자 반동으로 붕 날아서 성층권 뚫고 올라가는 중. 조만간 열권에서 하얗게 타버리지 않을지 심히 염려되는 바이다.
등산에서 서서히 백패킹으로 관심이 전이되어, 어떻게든 편안한 집 놔두고 노숙을 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최대한 쾌적한 노숙을 위한 장비를 사들이고 있자니 이것이 무슨 삽질인가 싶지만, 산에서 맞이하는 새벽이 너무나 짜릿함을 며칠 전 소백산에서 느꼈기에(국립공원 대피소 예약해서 1박으로 다녀옴) 앞으로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백산 직찍 일몰. 이렇게 중년이 되어간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그렇게까지 개고생 하며 오르는 것일까. 왜냐하면 마냥 좋기 때문이지여… 힘든데 좋아. 좋은데 개힘들어. 근데 너무 상쾌해. 이건 마치 할매할배들이 뜨거운 탕에 들어가 앉으며 크으 시원하다~!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을런지? 도대체 어디가 시원한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원한 그 느낌. 바로 그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옷장 속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등산복 덕분에 일상복과 등산복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완벽한 중년으로의 진일보가 이루어지고 있다.
남편이 한창 등산복을 작업복 대용으로 입던 시절, 도대체 왜 저런 후줄그레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세상에 이렇게 만고 편한 옷인 줄 미처 몰랐지 뭐야. 등산복 짱. 등산복 최고.
등산복장에 쨍한 색상이 많은 것은 만에 하나 조난당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구조대의 눈에 잘 띄기 위함이라고 한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의 색상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대략 망한 것 같기도 하지만 패션 테러리스트 외길인생 20여 년인지라(엄마가 골라준 옷 입던 시절은 그래도 빼자) 딱히 아쉽지도 않다…
아무튼 등산 좋아. 등산 짱. 등산 최고. 어디 한 번 올라와 보시든가 하는 포쓰로 위엄을 뽐내는 험준한 산들도 멋있지만, 항상 그 모습 그대로 맞이해 주는 동네 뒷산도 사랑스럽다. 어릴 때 초등학교 뒷산 오르내렸던 추억과 오버랩되어 지금의 산행이 더 즐거운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꾸준히 산에 오를 수 있도록 나의 체력이 받쳐주기를. 그리고 등산 용품을 지를 수 있도록 재력도 받쳐주기를…
오늘의 내 관절이 가장 젊은 관절이다. 더 늙어서 골병들어 갤갤 대지 말고 오를 수 있을 때 열심히 다니자!
그런 의미에서 한라산 가고 싶다. 남편님 협조 좀 안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