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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꽃 Feb 27. 2023

잠들지 않는 병원(3)- 희망은 긍정이 아니라 인정


803호 30대 남자의 고통은 잘린 손가락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본인을 돌봐주는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온갖 신경질을 부리며 소리 지르는 그는 이 상황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의 현실 부정은 여자친구의 결별 전화를 받고 더 심해진 듯 보였다. 결혼을 생각할 만큼 사랑했던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는 한 손의 기능을 잃은 남자친구가 부담스러웠나 보다. 몇 주가 지난 후 그는 잠잠해졌지만 얼굴에 드리운 슬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항상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거나 물끄러미 다친 손을 바라보는 모습이 많았다.


 그가 더 이상 간병인의 도움 없이 혼자 병원 생활이 가능해졌을 때, 다른 병실의 환자들과 함께 산책을 하고 친구들과 통화도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나마 얼굴이 조금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거치는 이 병원에서 803호의 19살 소년은 의연했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그 아이의 잠잠한 모습이 놀라울 뿐이었다. 하얀 얼굴에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다가 책을 펼치고 메모하기도 하고 괜찮냐는 부모님의 안부전화에 밝은 목소리로 '걱정 마세요.'란 말을 남겼다. 


"손... 많이 아프지?"


나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소년이 아프긴 한데 치료를 잘 받아서 괜찮다는 어른스러운 대답을 했다. 어떻게 다치게 되었냐는 질문은 너무 가슴 아픈 질문이라 대놓고 할 수 없다. 간신히 붙잡아 놓은 마음을 헤집어 놓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소년은 차분한 목소리로 학교에서 조기 취업으로 가게 된 회사에서 다치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 프레스라는 기계로 물건을 자르는 업무였는데 물건을 미는 속도 조절이 잘 맞지 않아 순식간에 손가락이 잘렸다고 했다.


"처음엔 손가락이 다 잘린 줄도 몰랐어요. 다음 물건 집으려고 하는데 손가락이... 그때부터 너무 아파서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내가 어떻게 다쳤는지 너무 궁금해하는 얼굴이었을까?

소년의 담담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냥 모든 것이 미안했다. 이렇게 듣고 있는 내 모습도. 이렇게 어린 소년이 신체의 일부분을 잃게 된 상황도.


"마음은 괜찮아? 너무 힘들지?"


"힘들죠. 가끔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이런 생각도 들고요. 그런데 울기만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아직 어리고 할 수 있는 게 많으니까 더 공부하고 노력해서 좋은 사람이 되야죠."


우문현답이었다.

19살의 소년은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뾰족하게 행동하는 맞은편 30대 남성을 바라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저씨도 괜찮아질 거예요. 저도 처음엔 그랬거든요. 엄마한테도 막 화내고.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인정하게 되고 받아들이게 돼요. 그때 좋은 말 많이 해주고 위로해 주면 아저씨도 좋아질 거예요."


희망은 무조건 적인 근거 없는 '긍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정'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19살 소년을 통해 깨달았던 순간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아픔과 불행을 보며 앞으로 잘될 거라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상대방이 괴로운 현실에 처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한 긍정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위로 또한 상대방이 위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걸 19살 소년은 알고 있었다. 


나는 남편의 병원 생활로 병원에서 풍기는 소독약 냄새만 맡아도 진저리가 나는 트라우마를 지금도 겪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깨닫고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지도 못하게 사고를 겪을 수 있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신체의 일부분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어떠한 불행한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처한 나를 그대로 인정하게 되면 희망과 미래가 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의 위로와 측은함으로 버티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내 삶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남편이 퇴원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인가...

형님 바라기 40대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수 후,  집행유예를 받고 취업해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아직 급여를 받지 못해 조금 걱정스럽다는 그의 말에 남편은 바보같이 일만 하지 말고 고용노동부에 신고하라는 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건강하세요!"


밝은 목소리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은 그가 잘 살고 있기를...

803호의 19살 얼굴이 하얀 어른 보다 더 어른스럽던 그 소년도, 현실을 마주하기 힘들어하던 30대 청년도 이제 슬픔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힘들 때마다 포기가 아닌 인정 하기를 배울 수 있도록 해준 2016년 D병원의 그들이 유난히 생각나는 요즘이다. 언젠가는 그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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