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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수야 Oct 08. 2020

트로트

할머니도 소녀였던 시절이 있었겠지#6

요즘 우리 할머니의 최대의 관심사는 트로트이다.


비단 우리 할머니와 같은 세대의 분들 뿐만 아닌

전 국민적으로 사랑을 받고 있는 이 트로트에게

나는 참으로 깊은 감사인사를 하고 싶다.


거의 대부분을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할머니에게

티브이는 소꿉친구와도 같은 존재이다.


너무도 익숙하고 없으면 허전하며

가끔 너무 잘 맞아 재미있을 때가 있는가 하면

너무 잘 알고 있어 재미없을 때도 있는

그런 존재


하루 종일 티브이를 켜 놓고 있노라면

가끔 너무 재미있는 영화나 예능의 한 회차를 볼 수 있지만

너무 자주 봐서 재미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할머니가 항상 티브이를 보면서 하시는 불평들이

트로트를 유행시키기 시작한 한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어떠한 연예인도 그렇게까지 좋아하며

'우리'라는 가족애가 느껴지는 단어를 쓴 적이 없던 할머니가

트로트 프로그램에 나오는

한 가수가 나올 때마다 쓰며

결국에는 온 가족에게

'누가 보면 잃어버린 아들이 티브이에 나온 줄 알겠다'는

타박 아닌 타박까지 듣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닌

온갖 트로트 프로그램을 두루 섭렵하시며

한 두 번이 아닌 두세 번, 네 번을 계속해서 몇 번이고

보고 또 보며


"아이고 우리 영웅이 잘~했다!!"

"이다음에는 찬호가 노래를 부르는 순서다!"


결국에는 누가 어떤 노래를 불러서 몇 점을 받는지

이다음에는 누가 노래를 부르고 누가 이기는지

그 순서까지 외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옆에서 함께 듣는 우리는

거의 반 강제로 할머니와 함께

같은 프로를 보고 또 보았고

참다못한 엄마가 몇 번 항의를 했지만

할머니의 완고함에 빈번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 또한 그렇게 크게 관심이 있지 않는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에서 반복학습처럼 듣는 것이 고역일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트로트에게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몇 번이고 같은 프로를 돌려 보면서도

지루한 기색 없이

눈꼬리에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잔뜩 물결이 칠 정도로

활짝 웃는 할머니의 모습이

요 근래에 참 자주 보인다.


그 잔 물결들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괜스레 나도 따라 물결치는 순간이 있다.


그게 참 좋아서.

나는 조금 지루하더라도

티브이 앞에 앉아서 어제 했던 프로를 또 보고 있는

할머니의 곁으로 가서 물어본다.


"할머니! 진짜 트로트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니깐 말이야! 티브이에서 이런 트로트 없었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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