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둘 남매 하나, <데이케어, 어린이집>
이곳은 저한테 그냥 어린이집이 아니었어요.
이곳은 제가 두려움을 이겨내는 과정 그 자체였답니다.
This school is not just a school to me.
This place meant path that I walked over fear.
두 아이는 데이케어(어린이집) 답지 않게 이름 자체에 school이 들어가는 곳에 다녔다. Play groups school. 학교처럼 정형화된 시스템을 지향하면서도 자연과 가깝고 정서를 풍부하게 하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이 작은 기관을 아이들도 나도 좋아했다. 둘째의 마지막 등교날 교장선생님의 손을 붙잡고 감사의 말을 전하며 눈물을 쏟고 말았다. 말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할 정도로 흐느껴 버려서 너무 창피했다. 아이들은 빨리 집에 가자고 성화인데 엄마들끼리 줄을 지어 교장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전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으니 소회가 남다른 집이 우리만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헤테로 엄마들과 동질감을 느끼는 일이 계속되니 내 정체성이 오락가락한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미 다녀간 모모가정 아이
입학 전, 아내와 나는 두 기관에 방문했다.
기관 1. Montessori School
기본인적사항을 적는 곳에 Mother, father가 적혀있었다. 교장선생님은 “I am sorry. We haven’t got a chance to change this part.” 서류를 받아 들자마자 바꿀 겨를이 없었다는 사과의 말을 전했다. 학교는 사소한 일들로 늘 바쁜 곳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을 바꿔 달라는 요구를 하기가 조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래도 이렇게 언급하기도 전에 사과를 받은 것으로 족했다. (다음 해에는 guardian1, 2로 바뀌었다.)
기관 2. Playgroups School
입학 서류에 아이의 정보와 보호자의 정보를 기재했다. parent 1, parent 2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배려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고 안심이 됐다. 결혼 보호법 Doma(결혼을 남, 여로 제한한 법)가 폐지된 지 3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지만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부부가정(남편과 아내를 이르는 '부부'와 혼동될 수 있으나 첫 글에서 '모모'를 자녀를 둔 레즈비언 부부로 임의로 부르기 시작했으므로 '부부가정'이라는 표현을 자녀를 둔 게이부부를 부르는 표현으로 임의로 사용했다. '가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써 혼동을 막고자 했다.) 하나와 우리 가족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미 서류가 수정되어 있다니 놀랍고 감사했다.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주 예전에 동성커플의 아이가 다녔던 적이 있고 초등학생 정도가 됐을 거라고 했다. 법제화되기 훨씬 전부터 가정을 꾸리고자 하는 모모가정의 아이가 어딘가에는 늘 존재해 왔다. 기관 1처럼 과거에 모모가정의 아이를 받은 기록이 없는 곳은 법제화 후에도 특별히 서류를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수요가 없기 때문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표기가 바뀐 이 서류는 우리가 만나보지 못한 모모가정의 발자국이었다.
모모, 누구 좋으라고 행사에 참여하나
나를 엄마라고 소개하는 자리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첫 애가 세 살을 향해가고 있는 시점인데도. 단순하게 내 이름만 소개하는 일이 갑자기 없어지고 아이와 늘 동행하며 누구의 엄마 누구로 소개를 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입이 달달 떨렸다. 영어로 학교에서 필요한 일들을 챙기는 것도 새로운 일상이었다. 아시아 배경의 아이로, 모모가정 가정의 아이로 살아갈 아이의 사회생활에 대한 근심걱정으로 기관에서 일어나는 작은 이벤트와 활동에 성실히 참여하려 노력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걸 좋아한다. 우리 첫째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언제든지 방문해 아이들의 수업과정을 살펴보거나 참여할 수 있는 작은 데이케어 었다. 교장선생님과도 쉽게 소통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에 등하교 시뿐만 아니라 등록금 수표를 전하거나 빼놓고 온 물건을 전해줄 때 자주 들러 가벼운 안부를 묻고 무슨 이야기라도 하려 애썼다. 케이팝이 주목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시아 문화를 배경으로 생활하는 우리 가족의 문화를 길게 설명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런 상황도 적극적으로 대면하고자 했다.
10월경에는 교실에서 김밥을 만드는 시연을 했다. (우엉은 가져가지 말자. 특유의 냄새를 힘들어했다.)
2월쯤에는 한복을 입어보는 체험을 준비했다. Chinse new year라고 불리는 음력설을 Lunar new year라는 단어로 대체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프레젠테이션 했다.
4월에는 Mud day. 진흙탕에서 뛰어놀고 난 아이들의 장화를 정리했다.
5월의 펀드레이징 행사에서 30명의 아이들에게 페이스페인팅.
11월쯤에는 핼러윈 퍼레이드를 구경하러 가고 나무가 많은 곳에 위치한 학교에서 낙엽을 쓸며 청소를 돕기도 했다.
그 밖에도 거의 매달 빠지지 않고 이벤트가 있었다. 때마다 모든 부모님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문화와 아이를 너무 좋아하는 미국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져 새삼 타국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됐다.
학교에 자주 얼굴을 비추고 일반 부모들과 네트워킹 할수록 도움이 되는 쪽이 아이인지 나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이로 인해 좋든 싫든 커밍아웃을 하게 되면서 평생 숨겨왔던 것이 없어진 것도 나.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 상세한 정보를 나눠 불편해지거나 반대로 너무 말을 짧게 끝내서 상대를 어색하게 했던 시간들이 있었던, 그렇다 해도 그를 통해 편안한 지점을 찾은 것도 나.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범위까지만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관건일 거라는, 나름의 결론을 얻게 된 것도 나. 이것은 나에게 좋은 것인가, 아이에게 좋은 것인가?
수고했어 오늘도
돌이켜 보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미국에 적응하고, 모모가정의 엄마로서 학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우리의 모습이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존재하기를 바라며 애썼던 시기였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무언가를 하겠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고려해 주는 미국문화가 다가왔던 시간이기도 했다. 나를 엄마라고 소개하는 자리가 적응이 안 되고 커밍아웃을 못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던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 그거 다 끝나고 여기서 오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