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회사원이 된 후 가장 큰 변화는 역시 월급이다. 월급을 빼놓고 어떻게 회사원을 논하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월급날만 되면 마법같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 그것이 바로 월급의 위대한 힘이다. 매월 25일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회사 생활의 알파이자 오메가!
대학 때는 학비와 생활비에 부모님의 손을 빌리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다.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또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한꺼번에 하는 건 피하고 싶어서 나는 차라리 경제적 궁핍을 택했다. 과외, 게임 제작 등 한 번에 수입원은 한 가지만 두고 최대한 아껴 쓰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모른다. 한 번은 친한 형의 결혼식에 참석을 하게 됐는데 3만 원은 조금 미안하고, 그렇다고 5만 원을 내기엔 당시 사정상 너무 어려워서 부득이하게 4만 원을 넣을 정도였다. 당연히 필수적인 것 이외에 지름이라는 건 꿈도 꾸기 힘들었던 시절이다. 매 학기 장학금 알아보는 것도 너무 힘들고 생활비를 버는 것도 힘들어서 조기졸업을 할 정도였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똑똑하고 열심히 해서 조기졸업을 한 줄 알지만 그건 전적으로 학비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리 학교의 조기졸업 기준도 매우 낮기도 했다. 누구나 마음먹으면 할 수 있었고, 나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첫 월급을 받고,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현실 자각을 하게 된 이후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나는 저축을 하지 않겠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거침없이 질러 줄 테야! 지르는 것도 해본 사람이 잘한다. 처음에는 마음만 그렇게 먹었지 실제로 잘 쓰지 못했다. 그러다가 2가지를 충동적으로 지르게 됐고, 이후 더 이상 지름에 주저함은 없어졌다. 역시 모든 일은 처음만 어렵다.
첫 지름은 바이올린이었다. 당시 회사에는 동호회 지원 제도가 있었고, 그중에서 악기를 배울 수 있는 동호회가 있었다. 회사 지원금을 더해서 소규모 그룹으로 선생님을 초청해서 배우는 제도였는데 나 역시도 참여해서 막연하게 동경했던 바이올린을 한참 배웠다.
처음엔 월 2만 원 정도의 저렴한 버전 렌트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몇 개월이 지나고 25만 원이라는 금액을 주고 새 바이올린을 질러버렸다. 사실 바이올린 25만 원이 비싼 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어렵게 살아왔던 나에게, 그리고 회사원이 된 뒤에도 이전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던 나에게는 상당히 큰돈이었고, 덕분에 한동안 더 열심히 바이올린에 매진했었다. 비록 시끄러워서 집에서 연습하기도 힘들고, 이런저런 이유로 레슨까지 중단했지만(그래 봤자 어차피 핑계이긴 하다) 바이올린은 나에게 상징적인 지름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큰 지름이 다가왔다. 어느 날 아무 생각 없이 회사 장터 게시판을 보다가 갑자기 중고 스쿠터 판매 글을 보았다. 하얀색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리고 질렀다. 140만 원을 주고.
스쿠터를 원래 좋아했나? 아니다. 그럼 타보기라도 했나? 아니다. 운전을 할 줄은 아나? 운전면허는 따긴 했지만 장롱면허로만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름은 그런 것이다. 뭔가에 홀린 듯이 질러버렸다. 그렇게 내 첫 스쿠터가 나에게 왔다.
"스쿠터는 전에 타보셨어요?"
"아니요. 처음인데요."
50cc 스쿠터라 당시엔 보험 가입이 의무도 아니었기에 심지어 무보험이었다. 저 답을 했을 때 순간 당황했던 판매자의 얼굴이 아직도 생각이 난다. 어쨌든 판매했으니 서둘러 돌아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일단 스쿠터를 받긴 했는데, 회사가 있던 분당에서 스쿠터를 받아서 서울 반포1동의 우리 집까지 약 25킬로를 타고 가야 했다. 그때부터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지,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가. 그래 봤자 시속 50km 정도가 최고 속도인 스쿠터였지만 생전 처음 타는 사람에게는 체감 시속 100km도 넘는 속도였다. 게다가 가야 하는 길은 넓고 차도 많은 도로였다. 어쩌겠나, 이미 저질러 버린 것을. 그때부터 약 2시간가량을 힘들게 타고 갔다. 덜덜 떨면서, 중간에 길 진입을 못해서 돌아가기도 하고, 살짝 넘어질 뻔도 하고. 신기하게 딱 한 번 그러고 나니까 자신감이 생겨서 다음부터는 너무나도 자유롭게 타고 다닐 수 있게 되더라. 그러다가 점점 더 빠른 속도도 탐내게 되고. 사람의 적응력이란 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 뒤로 2번의 스쿠터 교체를 거쳐 지금도 스쿠터를 가끔씩 타고 있다. 지금은 시속 100km도 가볍다. 그동안 스쿠터로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느꼈는지. 이 모든 것이 순간의 충동적인 지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그건 회사원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돈을 쓰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또 얼마나 새로운 기회를 가져오는가! 소비는 정말 짜릿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비로소 어른이 됐다고 느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