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
신입사원 연수를 진행 중일 때였다. 연수가 끝나면 어떤 부서로 가고 싶은지 1 지망부터 3 지망까지 써내라고 했다. 각 현업 부서에서는 여러 사람이 와서 본인의 부서가 얼마나 좋고 매력적인지 다양한 스타일로 열심히 어필을 했다. 내가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고심 끝에 3 지망까지 다 썼다. 내심 1 지망은 아니더라도 2 지망에는 되지 않을까 기대를 했다. 그리고 나는 3 지망 부서에 배정이 됐다. 나중에 알고 보니 1 지망은 아무도 뽑지 않았었고, 2 지망은 심지어 지원자 미달이라 일부 강제로 배정된 사람은 퇴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3 지망에 됐다. 이미 그전부터 3 지망 조직장님이 나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나는 회사에서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다른 길을 안 가봐서 모르지만 이후 결과만 봤을 때 3 지망 부서에 가게 된 건 굉장히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 선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회사원이 된 후 처음으로 맞는 연말 연초, 회사에서는 인센티브라는 축복을 직원들에게 선사했다. 그런데 조직장님이 나를 부르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누군가는 낮은 평가를 줘야 하는데, 다른 선배들은 다들 열심히 일했는데 낮은 평가를 줄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네가 낮은 평가를 받아야겠다. 잘 한 건 아는데 그래도 한 번만 이해해 줘."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첫 평가에서 평균 이하의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분을 조직장으로 좋아했기에 당시에 큰 불만은 없었다. 그리고 이후엔 잘해서 다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고. 하지만 첫 평가 결과로 인해 다른 동기들이 인센티브를 2회 받을 동안 나는 한 번만 받았다. 대화방에서 다들 기뻐할 동안 나는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때 확실하게 알았다. 나는 회사의 수많은 일개 직원일 뿐이라는 것을.
우연히 전부터 내가 꿈꾸던 영화 관련 업무에 살짝 발을 담그게 되었다. 하면 할수록 그 부서로 아예 이동을 해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동은 쉽지 않았다. 기존 조직에서도 내가 하던 일이 있었고, 새로운 일은 아직 계획 단계였다. 그래도 꼭 꿈꾸던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었기에 지금 조직에서 일을 열심히 마무리하고 잘 어필하면 꼭 옮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옮기긴 옮겼지만, 그 과정은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중간에 새로운 업무가 생겼을 때는 리소스를 문제 삼아 새로운 업무를 하지 못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조직장님에게(위 평가 때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메일을 쓰기도 했다. 그 결과로 "일단 해보고 말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이라는 씁쓸한 답을 얻었고, 이후 시간이 더 흘러 새로운 조직으로 옮길 수는 있었다.
부서 이동을 처음으로 해보면서 깨달았다. 나라는 사람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것이라는 점을.
어느 날 갑자기 잘 다니던 회사가 2개로 쪼개졌다. 그리고 나는 자회사로 가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상장사에서 비상장 작은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대표는 모두를 불러 모아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고 두 회사의 제도나 모든 것이 동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도 다른 회사에서 분사를 1회 더 겪었고, 합병까지 겪었다. 처음 한 번을 겪어 봤기에 두 번째부터는 그 충격이 덜했다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되었달까. 모든 결정은 회사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극단적으로 퇴사라는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직원은 따라가야 했다. 선택권은 사실상 없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었지만, 회사의 주인은 일개 회사원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회사는 월급을 주면서 그 월급에 합당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가. 갑을관계로 치면 원래 지불하는 쪽이 갑인 것이 세상의 진리. 회사에서는 직원의 자아실현, 꿈 이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 회사의 성과, 미래 계획 달성, 회사의 비전만이 중요했다. 다행히 직원의 꿈이나 성향과 회사의 그것이 부합한다면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다닐 수는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몇 년만 지나도 새로운 좋은 기회를 찾게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는 회사의 주인이 아니니까, 내 것이 아닌데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자기소개에 본인의 꿈을 실현하고 오랫동안 해보고 싶던 것을 하기 위해 회사에 지원했다는 사람은 얼마나 순진한지. 그보다 회사의 계획에 공감하고, 회사의 미래 그림에 내 이런 역량이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지원했다고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답일 것이다. 실제로 그래야 더 열심히, 더 오랫동안 다닐 수도 있고. 가끔 자기소개서를 물어보는 대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해주는 말이 저 말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때는 몰랐고 회사원 생활을 하다 보니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회사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인데 자주 잊는 사실이기도 하다. 회사원이 된 후 처음 1~2년간 이것을 깨달은 뒤로부터는 일을 할 때 나보다 회사의 성과를 더 앞에 두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는지, 내 가치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치밀하게 따졌다. 그래서 기왕이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은 방향으로 일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거의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일단 했다. 매우 계산적이지만 때론 필요에 따라 순응하기도 하는 것, 돈을 받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든지 회사를 떠날 수 있다. 늘 한 곳에서의 끝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다고 일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그건 내 가치를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이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준비는 하고 있지만 현재의 성과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유년기부터 내가 그려온 회사원으로서의 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