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 너머로 스며드는 따사로움에, 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야 야! 정신 좀 드나?”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병실 문을 확 열며 외쳤다.
“간호사님! 여기 좀 와주세요!”
'여기가... 병원인가?‘
수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다가, 온몸을 짓누르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근육과 관절이 한꺼번에 항의하듯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후 간호사가 어머니와 함께 들어와 링거병을 살폈다.
"담당 선생님께 연락드렸어요. 곧 오실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전에... 심장이 갑자기 멈춘 적 있으셨나요?"
수가 잠시 숨을 고른 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니요. 그런 일, 없었어요.“
의사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심장이 갑자기 멈췄습니다. 119로 실려 오신 거예요. 심폐소생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정말 위험할 뻔했습니다. 마치 총에 맞은 듯, 심장이 그대로 멎어버렸더군요.
MRI, CT, 혈관검사까지 모두 마쳤으니, 결과만 확인하시면 퇴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어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의사가 말을 마치고 병실을 나서자, 어머니가 수의 손을 꼭 잡았다.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길래 방문을 열었더니, 네가 쓰러져 있더라. 그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내 수명이 십 년은 줄어들었지 싶다.”
어머니는 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손을 꼭 감쌌다. 그러다 문득 놀란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야! 손이 왜 이렇게 차갑냐? 얼굴도 창백하고... 무서운 꿈이라도 꾼 거야? 뭐라고 좀 말해 봐.“
수는 멍하니 병실을 두리번거리다, 천천히 시선을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 나, 병원에 오래 있었어? "
"어제저녁에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괜찮다 해서 새벽에 일반실로 옮겼지. 만 하루도 채 안 됐어.“
’그럼... 나는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지? 그 사람은 ...‘
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수건을 들어 눈물을 닦아 주며 나직이 말했다.
"무슨 꿈을 꿨기에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거냐... 참.”
수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오래도록 울음을 삼키듯 울었다.
"엄마! 내 방에 있던 책 못 봤어요? 병원에 가기 전에 읽던 건데, 정말 중요한 책이에요.“
"몰라."
엄마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눈은 여전히 TV 화면을 향해 있었다.
"정말 중요한 책이라니까요. 잘 좀 생각해 봐요.”
수의 말에 그제야 엄마는 TV 소리를 줄이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병원에 가기 전에 네 방에 무슨 책이 있었는지 난 몰라. 퇴원할 때도 나 너랑 같이 왔잖아. 청소도 못 하게 하고, 들어오지도 말라 그래서- 책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난 모르지.
대체 무슨 책인데 그래? 꼭 필요한 거야?“
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는 듯 말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방문을 닫았다.
강물은 여전히 잔잔히 흐르고 있었지만, 그 물가에 염색한 천을 씻던 염색공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색색의 천이 강물 위에 펼쳐지던 풍경 대신, 이제는 관광객을 태운 조각배들이 무리를 지어 다리 밑을 지나고 있었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풍경 또한 달라져 있었다.
수는 강을 건너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진우와 함께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산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갈수록 대나무는 점점 우거져, 햇살조차 잘 스며들지 않았다. 어둡고 고요한 숲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길이 여기서 끝나는가 싶을 즈음, 나무 계단 하나가 하늘로 이어지듯 위로 뻗어 있었다. 계단 꼭대기, 작은 점처럼 보이는 절 하나가 숲속에 고요히 숨어 있었다.
수는 나무 계단을 한 칸, 또 한 칸 오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에 이르자, 열린 대문 너머로 마당을 쓸던 한 스님이 고개를 들었다.
스님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보자기를 풀어, 작은 목함을 수 앞으로 밀었다.
"말씀하신 그 무렵, 조선인 한 분이 저희 절에 잠시 머무셨다고 합니다. 일본 공사관에서 특별히 부탁한 손님이라 하여, 저희 스님들도 여러모로 살피고 조심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은 암살을 당하셨지요.”
스님의 말이 끝나자, 수는 숨이 턱 막히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겨우 한 모금을 삼켰다.
스님은 조용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수의 잔에 다시 차를 따르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잠시 후, 스님은 다시 입을 열었다.
"선대 스님께서 전하신 말씀입니다.
그 조선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이런 말을 남기셨다 합니다.
’머지않아, 미래에서 한 여인이 나를 찾아올 것이오. 그때가 되면, 이 목함을 꼭 전해 주시오.‘
하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록 이 목함을 찾으러 온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스님은 목함을 싸고 있던 빛바랜 보자기를 고이 접어 목함 옆에 가지런히 놓았다. 보자기의 한쪽 끝에는 연분홍 자두꽃 세 송이가 고즈넉하게 수놓여 있었다.
그 자두꽃을 본 순간-
수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스님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저는 암 말기입니다. 다음 달이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지요. 하지만 이 절에는 대를 이을 후계자가 없어, 조만간 문을 닫아야 할 처지입니다. 그동안 주인이 찾아가지 않은 이 목함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대로 사라지는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목함 안에 있던 책을 인터넷 경매에 내놓았습니다. 혹시나 주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희망이었지요.
그런데 정말로 누군가 입찰을 해왔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책을 보냈지요.
그러나 얼마 뒤, ’수취인 불명‘ 도장이 찍혀 다시 이 절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스님은 말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듯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며칠 전, 이 책을 찾으러 오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부처님의 가호라 여겼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마음 편히 입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의 말이 끝나자, 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오래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세월의 흔적은 선명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래 있었고, 귀퉁이와 표지는 오래도록 품에 안겨 있었던 듯 닳아 있었다.
수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들어 올렸다.
마치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돌아온 생의 한 조각을 꺼내듯이.
표지에는 앞부분이 희미하게 지워진 한글이 남아 있었다.
’...당...사‘
수는 가늘게 떨리는 손끝으로 그 흐릿한 글자를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익숙했다. 분명 자신이 적은 붓글씨였다.
책장을 넘기자, 점이와 도깨비 아기 장이의 이야기, 금이 언니의 사연, 그리고 진, 달, 래... 그녀들의 이야기가 마치 살아 움직이듯 눈앞에 펼쳐졌다.
그 속에는 약재를 다듬는 진우의 옆모습이, 수가 직접 그려 넣은 그림으로 남아 있었다. 붓끝에서 전해진 손길이 오롯이 살아 있었다.
툭-
눈물이 한 방울, 책장 위에 떨어졌다.
수는 한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 순간-
수의 두 눈에 가득 차오른 것은, 너무도 그리운 진우의 글씨였다.
’수, 그대를 찾으러 내가 가리다!‘
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책을 끌어안았다.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그 자리에서 오열했다.
잠시 후, 수는 목함을 자두꽃 세 송이가 수놓인 보자기에 다시 싸서 품에 안았다. 그리고 절을 나서며 나무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예전 이 절에서 책을 건네주던 동자승이 서 있었다. 앙증맞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이제, 기억을 잃지 않도록 잘 간직해야 해요.”
수는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리고 이윽고 물었다.
“스님은... 누구세요?”
동자승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의 미래!”
그 말을 남기고, 천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절 안의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긴 시간 동안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
<수 이야기-얽힘과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