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진, 달, 래

by 릿다


(파혼)


"우리 아씨, 가엾어서 어쩐대요...“

대문을 들어서는 수를 본 삼월이는 와락 달려들며 눈물부터 쏟았다.

곧 뒤따라 나온 새언니도 수를 끌어안고는 흐느끼며 울었다.

”아가씨...“


수는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래서 급히 부르신 거예요?"

삼월이가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수를 올려다보았다.

"일이야, 아씨한테 난 거지요. 괜찮은 척하시는 게 더 마음 아프구먼요.“


새언니도 눈물을 훔치며 말을 보탰다.

"무슨 좋은 일이라고... 삼월아, 그만해라. 아가씨는 어서 안방으로 들어가 보세요. 파혼서를 받으셨는데, 그 충격에 어머님이 몸져누우셨어요."

'파혼서 때문에 이 난리야? 난 또 무슨 큰일 난 줄 알았네.‘

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안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방에 들어서자, 머리에 흰 띠를 두른 어머니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물을 한 모금 들이킨 뒤, 수를 곁에 앉히고는 한심하다는 듯 눈을 치켜올렸다.

"아이고, 이 헛똑똑이야. 오죽 못났으면 정혼자를 과수댁에게 빼앗기냐!"

어머니는 가슴을 두드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현서가 의원에 드나든다기에, 나는 정혼자인 너 보러 다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혼사 날짜까지 다 잡아놨는데... 글쎄, 과수댁이랑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했다지 뭐냐. 거기다 오늘 아침엔 파혼서까지 보내왔더라!“

어머니는 물사발을 다시 움켜쥐고 벌컥벌컥 들이킨 뒤, 홱 돌아앉아 수에게 고함쳤다.

"이 꼴이 될 때까지, 너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니! “


그때, 방문이 쾅 하고 열리며 아버지가 들어섰다. 풍채 좋고 위엄이 서린 모습이었다. 수는 황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는 가늘게 뜬 눈으로 수를 훑어보다가, 크게 기침을 하며 곰방대를 놋쇠 재떨이에 탕탕 털었다. 뒤이어 삼월이가 허겁지겁 들어와 다과상에 식혜를 내려놓았다.

"부인, 집안 단속을 어찌 한 것이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대체 뭘 하고 있었단 말이오!”


어머니는 눈치를 보며 이불을 말아 치우고 아버지 곁으로 다가앉았다.

"현서 그놈, 애초부터 작정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자기 앞으로 된 땅도 몽땅 팔아 돈으로 챙겨갔다더군요. 누가 뒤를 봐준 게 분명해요.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그리 감쪽같이 야반도주해요?"

아버지는 곰방대 재를 요란스레 털며 이를 악물었다.

"내 그놈, 잡기만 해 봐라..."


그러다 수를 향해 눈을 번뜩이며 호통쳤다.

"그리고 너! 그 머리 꼴은 또 뭐냐!“

어머니는 깜짝 놀라 수를 끌어안았다.

"아이고, 대감 진정하셔요. 애도 충격이 컸나 봐요. 그게 어디 온전한 정신으로 겪을 일이랍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가 살며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참에... 서역 선교사가 운영하는 여학교에 다녀보려고 해요."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덜미를 움켜쥐며 버럭 고함쳤다.


"너! 너-, 실성을 한 게냐!“

옆에서 삼월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씨 실성한 지는 꽤 됐구먼요..."


"뭐라!” 아버지가 삼월이를 노려보았다.

“부인! 수가 몸이 허해 의원에서 보약 먹으며 요양하고 있다 하지 않았소?”

어머니가 삼월이를 흘겨보며 급히 맞장구쳤다.

"그럼요. 그렇지요. 수 얼굴 좀 보세요. 전보다 훨씬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게다가 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에요. 요즘 세상이 예전 같지 않잖아요. 지난번 부인들 모임에서도 들었는데, 사대부집 규수들도 독선생을 들여 서역 말이니 일본 말이니 배우게 한다더군요.”

삼월이도 미안했던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아씨야말로 서역 말도, 일본 말도 얼마나 잘하는데요! 동네방네 소문이 자자하다니까요. 그쵸, 아씨?"

삼월이는 수를 힐끔 보며 헤헤 웃었다.


그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지며, 곰방대를 다시 물고는 깊게 빨아들였다.

"일전에 박영효를 만났는데 그러더군. 수가 일본말 통역을 해 줘 큰 도움이 되었다고..."

어머니는 이때다 싶었는지 목소리를 낮추고 은근히 덧붙였다.

"당분간 혼처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이참에 신식 공부를 시켜 봅시다. 수야 영리한 아이라 배움도 빠를 거예요.“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곰방대를 툭툭 털었다.

"그래 영리해서 이 꼴이오? 내 원... 딸자식 하나 때문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닌 줄 모르시오.“

그렇게 몇 번 더 곰방대를 피워 문 아버지는 마침내 식혜 그릇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는 수를 애잔하게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몇 번 더 하고는 안방을 나갔다.





( 이화당)


"이화당(梨花堂)" 이라는 현판이 걸린 여학교는 아담한 한옥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마당 한가운데 둥근 화단이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방들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수는 국화꽃이 곱게 핀 화단을 지나 가을 햇살이 드리운 마루에 걸터앉았다. 정갈한 마당과 기품 있는 마루는 예전에 지인과 함께 찾았던 전통 찻집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마루 밑 댓돌 위에 놓인 온혜(운혜)가 이곳이 여전히 조선임을 일깨워 주었다.


’꿈결 같은 시간 속에서 참 많은 일이 겪었지...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곳의 내가 낯설지가 않아.‘

그런 생각이 스치자, 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때, 열린 대문으로 누가 들어섰다. 수는 황급히 일어나 먼저 인사를 건넸다.

"Nice to meet you!"

"오! 미스 수? 미스터 진우에게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서양 선교사가 다정하게 수를 껴안았다.

"내가 갑자기 중국에 가야 해서요. 그래서 미스터 진우에게 부탁했습니다. 잠시 학생들에게 서양말을 가르쳐 줄 티처를 소개해 달라고요.“

그녀는 말을 마치며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랐다. 그리고 손짓으로 수를 이끌었다.


수가 마루에 오르며 다시 물었다.

"What’s your name?“

선교사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Sorry, sorry, 마리 론, 미스 론입니다. "

그녀는 연신 ‘쏘리’를 반복하며 웃음을 지은 뒤, 방문을 열었다.

‘Hello!’

방 안에 있던 여학생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환히 대답했다.

‘Hello!’


방 안에는 책상 대신 방석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앉은 세 명의 여학생은 막 소녀티를 벗은 듯 앳돼 보였다.

'와...‘

수는 속으로 감탄했다.


세 여학생은 마치 십 대 걸그룹처럼 깜찍하고 예뻤다. 하얀 깨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은 단아하면서도 세련되었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정갈히 빗어 올린 자태는 여염집 규수라기보다 무대 위의 예인(藝人)을 연상케 했다.

미스 마리가 수를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중국에 잠깐 가 있는 동안, 여기 새 선생님이 서양말 가르쳐 줄 거예요. OK?"

세 여학생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중 한 명이 수를 향해 갸웃하며 물었다.

"선생님은 조선분 같으신데, 서양말은 언제 배우셨어요? “

다른 학생도 웃음을 머금으며 거들었다.

"정말 서양말 잘하시나요?“


그러자 미스 마리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브 코스! 수 티처, 서양말 베리 굿!”

수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나는 본래 말 가르치는 일을 했어. 너희에게도 충분히 내 실력을 보여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미스 마리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차 준비해 올게요.”


그녀가 방을 나서자, 수는 자리에서 허리를 곧게 펴며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자, 우리 자기소개부터 해 볼까? 누구 먼저 할래?"

그러자 한 여학생이 수줍게 속삭였다.

"선생님부터요."


수는 가볍게 웃으며, 조금은 장난스럽고도 담담한 말투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내 이름은 이수. 요즘 한양에서 소문으로 조금 유명하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너희도 알고 있지?“


세 여학생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한 명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민 병조판서 댁 장남이 과수댁과 야반도주했다는 소문, 요즘 장안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죠.”

그러자 다른 여학생이 곧바로 말을 보탰다.

"그 잘난 정혼자를 과수댁에게 빼앗긴 아씨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여인네‘라고 떠들썩하던데요.“


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담담히 웃었다.

"정혼자가 야반도주해 장안의 여인들 동정을 받고 있지만, 사실 난... 기뻐. 정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났으니까.

너희들도 freedom이라는 단어 알지? 내 자유로운 삶을 함께 기뻐해 줄래?”

세 여학생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키득거리더니, 한 명이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난봉꾼이지, 술주정뱅인지도 알지 못한 채, 부모가 살라 하면 그저 살아야 하는 양반님들 삶도 참 안타깝기는 해요.“

그러고는 셋이 함께 공감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이윽고 한 명이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진이예요. 언젠가 조선 제일가는 요릿집을 열고 싶어 서양말과 일본말을 배우고 있어요. 지금은 예월관에서 창과 춤으로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지요.”

옆에 있던 여학생도 수줍게 말을 이었다.

"저는 달이예요. 진이와 함께 조선 제일가는 요릿집을 차리는 게 제 꿈이에요. 지금은 저도 예월관에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여학생이 활기차게 말했다.

"저는 래이에요. 진이, 달이와 같은 꿈을 꾸고 있어요.”

수는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진이, 달이, 래이... 너희 이름을 합치면 진달래네?“


세 여학생이 동시에 환하게 웃었다.

"네! 조선 땅 어디서나 피어나는 진달래처럼, 저희 이름도 그 진달래처럼 꿋꿋하고 생명력 강해요. 훗날 요릿집을 열면 현판도 꼭 ’진달래‘로 걸 거예요.

"브라보! 정말 멋지다. 진달래, 너희 세 자매가 조선 제일가는 요릿집 주인 되는 그날까지 내가 응원할게. 파이팅!"


세 여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선생님, 파이팅이 무슨 뜻이에요?“

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반드시 꿈을 이루자는 뜻이야. 우리 다 같이 해 보자. 파이팅"

그러자 진달래 세 자매는 서로를 마주 보며 키득거리더니, 동시에 힘차게 외쳤다.

”파이팅!“




(춤)


조선 제일의 학춤을 꼭 보여주겠다며 성화를 부리는 바람에, 수는 남장을 한 채 예월관을 찾았다.

홍등이 주렁주렁 매달린 화려한 기방의 대문 앞에서, 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리를 지어 대문을 들어서는 사내들을 향해, 꽃처럼 곱게 단장한 기녀들이 달려 나와 웃음꽃을 피우며 손님을 맞았다. 이내 그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안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남장을 했어도, 기녀들이 있는 요릿집은 처음이었다. 문턱을 넘는 일이 쉽지 않아, 수는 한참이나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서성였다.

"아니, 수 낭자께서 여기서 뭘 하고 계십니까?"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진우가 약봉지를 들고 빙긋 웃고 있었다.


"놀랐잖아요! 의원님은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제중원에서 공부하신다더니... 기방에도 드나드세요?"

진우는 수 곁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누가 들으면 질투하시는 줄 알겠습니다. 나야 의원이니 약 배달 온 것이지요.”

수가 얼굴을 붉히며 눈으로 흘기자, 진우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리 내 웃었다.

"농입니다. 진이의 학춤을 보러 오신 거지요? 들어가시죠. 아이들이 수 낭자 온다고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습니다."

말을 마친 진우는 성큼성큼 예월관 안으로 들어갔고, 수는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을 발견한 래이가 반갑게 달려와 연못가 정자로 안내했다. 정자에는 소박한 소반과 술상, 방석이 이미 준비되어 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래이는 정자로 오르는 진우의 뒤를 따르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진우는 돌아서며 부드럽게 답했다.

"마음 써 줘서 고맙구나. 여기 약이 있다. 아이들에게 전해 다오."

약봉지를 받는 순간, 래이의 손끝이 진우의 손을 스쳤다. 그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감추듯 얼른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수는 그런 래이의 모습을 못 본 듯, 정자로 올라가 신을 벗고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자리를 잡자, 마당에는 돗자리가 펼쳐졌다.

그리고 이내-

학춤이 시작되었다.


달이가 돗자리에 앉아 거문고 줄을 퉁기자, 흰 저고리와 치마 차림의 진이가 흰 버선을 신고 긴 흰 띠를 어깨에 걸친 채 마당으로 들어섰다.


거문고 선율에 맞춰 사뿐히 내딛는 그녀의 발끝은 곡선을 그리며 흘렀고, 둥근 어깨와 팔짓은 줄 위에서 흔들리는 음처럼 유연하게 퍼져 나갔다.

이윽고 남장을 한 래이가 등장하자, 두 사람은 마주 선 학처럼 짝을 이뤄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흥겨운 장단에 맞춰 춤추는 두 학의 모습에, 보는 이들의 어깨까지 절로 들썩였다.

곧 가락이 애잔하게 바뀌자, 진이는 슬픈 울음소리를 흉내 내듯 끼룩거리며, 어깨에 걸친 긴 흰 띠를 밤바람 속으로 흩날리듯 던졌다.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버선발이 래이에게 다가가더니, 한쪽 팔을 그의 어깨에 조심스레 걸치고, 고개를 반대편 어깨에 기대었다. 다른 팔은 날개를 접듯 내려, 마침내 래이의 품에 안기듯 몸을 맡겼다.


마지막 음이 공기 속에 스며들 듯 잦아들자, 거문고 소리도 또한 고요히 멎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곧 사방에서 터져 나온 환호와 박수가 마당을 가득 메웠다.

수와 진우도 손뼉을 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진이와 래이는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물러났고. 달이도 거문고를 챙겨 건물 뒤로 사라졌다.

그때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잠시 뒷간에 다녀오겠소.”

그는 곧장 자리를 비웠지만,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수는 점점 이상한 기운을 느끼며 정자에서 일어나 건물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뒷마당 한켠에서, 진우는 박영효와 처음 보는 청년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뒤에서 달이가 수를 불렀다.

"달이야! 공연 너무 멋졌어. 최고였어!"

수의 말에 달이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모두들 진이의 학춤은 최고라고 해요. 진이는 외국 손님이 오면 대궐에도 불려가곤 한답니다."

"달이의 거문고도 대단했어!"

"...정말요?“


달이의 두 눈이 반짝이며 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 곧 멀리 있는 진우를 발견하자, 그녀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의원님은 왜 저런 분들과 함께 계시는 걸까요... "

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려, 멀리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분들... 누구지?”

달이는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을 때면 꼭 저희더러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일본 낭인들과도 어울리는 걸 보면... 무슨 큰일을 도모하시는 것 같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달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의원님은 늘 저희에게 약도 지어주시는데... 나쁜 일에 휘말리시진 않으셨으면 해요."

"...무슨 약을 지어주셨는데?"

수가 물었다.


달이는 시선을 피하며 낮게 속삭였다.

"...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약이요.“


그 말에 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밤은 깊었지만, 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진우를 기다리며 의원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늦은 밤에 왜 여기 서 계십니까... 혹시 저를 기다리신 건가요? “

수는 굳은 얼굴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읽은 진우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예월관에서 미안하오. 아는 이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함께 오지 못했소. 부디 양해해 주시오.“

진우는 장난을 들킨 아이처럼 당황한 눈빛으로 수를 바라보았다.


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낮게 물었다.

"그 아이들에게,.. 아기가 들어서지 않는 약을 지어주신다고요?“


수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그 아이들 중에는 초경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도 있습니다. 아직 너무 어린 나이지요. 그런데도 무심히 그 약을 마시고 있다는 걸 아십니까? 자신이 원할 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말입니다.”


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깊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의원님께서는 금이의 부당한 소박에 마음 아파하시고, 현서 오라버니와의 재혼을 진심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점이와 아기 장이를 위해 고생하시며, 거만한 이방의 행패도 묵묵히 참으셨지요. 먼지투성이 문서창고를 뒤져 억울한 이의 증거를 찾아주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아는 의원님은, 고개 숙인 조선의 여인들과 아이들에게 정을 나누고 연민을 품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마음 때문에 조선의 변화를 바라신 것 아닌가요?“


진우는 돌아서서 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수 낭자를 실망시켰다면 미안하오. 그러나 나는... 낭자가 생각하는 그런 좋은 사람만은 아니오.“

진우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낮은 목소리로 이어갔다.

”예월관의 밤은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달이 지고 해가 뜨는 대낮의 예월관은... 아수라장이 됩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아기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지요. 때로는 산모와 아이가 함께 목숨을 잃기도 하고요.

그녀들은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이면서, 동시에 집안의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월관을 찾는 자들에게는 그저 한갓 노리개일 뿐이지요.“


진우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약을 지어주었습니다. 무고한 생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는 것이... 너무 괴로워서. 그 가엾은 목숨에 매달려 살아가는 이들이... 안쓰러워서요.“

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마당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밤이 깊었으니... 이야기는 이만합시다."

수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이제 본가로 돌아가겠습니다. “

진우는 말없이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는 <6화-소포>로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



2eb2c6b6-1824-4107-ad86-7da45a09a149.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