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 언니는 언문도 알고, 한자도 제법 읽잖아요. 이번 기회에 서역 말도 한번 배워 봐요.
배워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금이는 바느질하던 손을 멈추고 수를 바라보다 환하게 웃었다.
"아씨는 가끔 미래를 내다보듯 말씀하시네요. 영민하셨어 그런지, 정말로 앞날을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아요.
수는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나도 총명하단 소리를 듣네, 하하하!
억쇠 어멈, 들었지? 나중에 의원님 오시면 꼭 전해 줘요. 알았죠? 꼭!“
억쇠 어멈은 혀를 차며 웃었다.
"그리 의원님께 자랑하고 싶으세요? 일본도 함께 다녀오시고... 이러다 겹사돈 맺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겹사돈? 처음 듣는 말인데, 왠지 느낌은 좋은걸..."
순간 억쇠 어멈과 금이는 동시에 입을 틀어막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웃지 말고, 억쇠 어멈도 이참에 언문이라도 배워 보세요. 내가 친절히 가르쳐 드릴 테니."
"아이구, 일 없어요. 그런 머리 아픈 건 질색이에요.
지는 그냥 시원한 미숫가루나 타 오렵니다.“
그 말과 함께 억쇠 어멈은 훌쩍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수는 금이의 바느질 바구니를 옆으로 밀어두고 평상에 위에 앉으며 웃었다.
"칭찬도 들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말 나온 김에 지금 한번 배워 봐요.”
수는 붓을 들어 종이에 또박또박 적었다.
A, B, C...
그리고 붓을 금이에게 건네며 따라 써 보라고 했다. 금이는 몸을 앞으로 숙이고, 정성껏 글자를 베껴 썼다.
그 옆에서 수가 말했다.
”이것이 서역 글자랍니다. 에이 비 씨... “
수가 소리 내어 읽어 주고 있을 때, 누군가 의원 마당으로 들어섰다.
가죽에 수를 놓은 혜를 신고, 하얀 도포에 갓끈까지 맨 사내가 생뚱맞게도 검은 안경을 쓰고 의원 안으로 들어섰다.
뒤로 감추고 있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자, 그 손에는 뜻밖에도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는 평상에 앉은 수와 금이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곧장 금이 앞으로 다가와 꽃을 내밀었다.
"수 낭자! 내가 집을 나간 뒤, 낭자가 크게 상심해 의원 신세까지 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소.
이 꽃은 미안한 마음을 담은 것이니, 받아주시오.”
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를 바라보다가, 얼른 수 뒤로 몸을 숨겼다. 수 역시 놀라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당... 당신이 집 나간 정혼자?"
사내는 잠시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수를 보더니 물었다.
"그쪽이... 수 낭자요?"
수는 어이가 없어 허허 웃었다.
"어릴 적에 정혼했다던데, 정혼자 얼굴도 모른단 말이에요?“
정혼자는 무안한 듯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내 말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크는 아이들 얼굴은 열두 번도 바뀐다 하지 않소.”
그는 슬쩍 수 뒤편을 힐끔 보더니, 금이를 향해 말했다.
"허나 아무리 달라진다고 해도, 그 집안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나올 수는 없지..."
헐- 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렇고, 정혼자 양반. 집 나갔다가 대체 언제 돌아온 겁니까?“
"며칠 되었소."
정혼자는 대답하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금이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 눈길이 불편했던지, 금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억쇠 어멈에게 간다며 물러났다.
수는 그제야 물었다.
"그 썬그라스는 또 어디서 난 거예요?”
사내는 놀란 듯 검은 안경을 벗으며 외쳤다.
"오! 이게 바로 ‘썬-’ 해를 가리는 유리 글라스요. 그런데 어찌 ‘썬글라스’라는 서역 말까지 알고 있소? 놀랍구려!“
그는 말을 멈추더니, 수를 요리조리 살피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머리... 머리카락을 저렇게 댕강 잘라내다니! 용기가 대단하오. 사실 나도 머리를 서양 선교사처럼 짧게 잘랐다가 아버지께 쫓겨났지 뭡니까. 그 탓에 지금껏 타국을 떠돌아다녔소.
그러다 머리가 자라 겨우 상투를 틀고서야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런데 며느리 될 여인까지 머리를 싹둑 잘랐다 하면... 우리 아버지께서... 허, 상상조차 하기 싫구려. 하하하!”
수는 말문이 막혀, 그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정혼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말없이 바라보는 수의 눈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혼자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방금 그 여인은 수 낭자와 무슨 사이요?
내 조선뿐 아니라 여러 나라를 떠돌았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봤소.“
수는 옆 눈으로 그를 게슴츠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우린 그런 걸 보고... '첫눈에 반했다'고 해요."
”헉!“
정혼자는 숨을 턱 막힌 듯 몸을 굳혔다.
수는 당황해 그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외쳤다.
"숨 쉬세요! , 하나 둘... 하나 둘! 빨리요!"
”후우...“
정혼자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왜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 해요?”
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정혼자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중얼거렸다.
"정곡을 찔려, 그만 급사하는 줄 알았소..."
그때 억쇠 어멈이 미숫가루를 들고 돌아왔다. 정혼자는 냉큼 받아 들더니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면서도 계속 두리번거리니, 억쇠 어멈은 못마땅한 눈길로 힐끔거리며 흘겨보았다.
미숫가루를 다 비운 정혼자는 자리에서 휙 일어섰다. 도포 자락의 먼지를 툭툭 털고는 말했다.
“이만 가보겠소.”
누구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올 때 쓰고 왔던 검은 안경을 다시 꺼내 썼다. 그리고는 학처럼 휘적휘적 의원 문을 나섰다.
"정혼자가 다녀갔다고요?"
진우가 우물가에서 손을 씻으며, 수건을 들고 서 있던 수에게 물었다.
"네...."
진우는 손을 멈추고 수를 바라보았다.
"별 감흥이 없는 것 같군요. 정혼 기간이 꽤 길었다고 들었는데.“
수는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흥은요... 그냥 허풍이 좀 심하더군요. 멀쩡하게 생긴 게 다였어요.
아, 생김새는... 꽤 잘생겼더군요.”
"잘 생겼다...“
진우는 중얼거리듯 따라 했다.
그러고는 괜히 수건을 한 번 더 털어 내더니, 힘주어 빨랫줄에 걸었다.
"그보다 의원님, 요즘 늦게 들어오시던데... 일전에 말씀하신 그 '대의' 때문인가요?“
진우는 평상에 걸터앉아 달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대의라...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작은 모임이에요.
뜻을 함께하는 몇몇 사람들과... 요즘의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 같아서요. 그래서 제중원을 드나들며 서양 의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의 서적과 기술은 정말 놀랍습니다. 사람의 맥을 짚어 병을 짐작하는 한의술과는... 전혀 다른 세계죠.”
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그래도 저는 의원님의 의술이 더 믿음이 가는데요.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는 법이잖아요.“
진우는 그 말에 피식 웃더니, 멋쩍은 듯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만 들어가 쉬세요.“
그는 더 말없이 일어나 사랑방으로 걸어갔다.
(파혼서)
"얼굴이 왜 그래요? 누구랑 싸우기라도 했어요?"
억쇠 어멈이 의원에 차를 가져가라 해서 갔더니, 그곳에 정혼자 현서가 얼굴이 엉망이 된 채 앉아 있었다.
수는 조심스레 찻잔을 들어 진우와 현서 앞에 놓았다. 부은 입술로 차를 한 모금 마신 현서는 얼굴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파혼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가 밥상으로 제 얼굴을 내리치셨소. 어머니가 말리지 않으셨으면... 지금쯤 제중원이 아니라 극락에 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 말을 듣고 진우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파혼요? 수 낭자랑요?“
현서는 수를 향해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오죽했으면, 죽을 각오로 말씀드렸겠습니까. 수 낭자는... 이해해 주시겠지요?"
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어요. 사랑은 죄가 아니잖아요. 그저, 호르몬의 일시적 이상 분비일 뿐이죠.”
진우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을 반짝였다.
현서가 말을 이었다.
"역시, 수 낭자는 자유연애 주의자! 내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는 분이었소.
정작 당사자들은 서로 이해하고 있는데, 왜 주변 사람들만 호들갑을 떠는지 모르겠어요.
... 그건 그렇고, 금이 누이는 어디 계십니까?“
현서는 이 와중에도 눈길은 금이를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우가 짐짓 안쓰러운 듯 입을 열었다.
"금이 부인도 같은 마음인지 먼저 확인하셨습니까? 마음은 통하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겁니다. 조금 성급하신 것 같아서요."
현서는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며 수를 바라보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주위에서 나서줘야 하지 않겠소.“
수는 어이없다는 듯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정말 염치도 없으시네요. 파혼당한 옛 정혼녀에게 중매까지 부탁하시겠다니."
현서는 멋쩍게 웃으며 다가와 수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내가 얼마나 기댈 데가 없으면 이러겠소. 게다가 금이 누이는 속마음을 수 낭자에게만 털어놓지 않소.
둘 사이가 각별하니...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으흠- 거기요. 그 팔은 놓고 이야기하시지요. 수 낭자 난처하십니다.”
진우가 나직이 말하자, 현서는 움찔하며 팔을 놓고 헛기침을 했다.
“그래... 파혼서는 이미 쓰셨습니까?”
진우의 물음에 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먹과 벼루를 좀 빌려주시오.”
이윽고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수에게 책임이 돌아가지 않도록 조심스레 파혼서를 써 내려갔다.
(진심)
저녁 해가 넘어갈 무렵, 아직도 금이의 방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수는 부엌으로 가 억쇠 어멈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금이 언니, 어디 갔는지 아세요?”
“바느질감 얻으러 간다고 나갔는데... 아직 안 돌아왔어요?”
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네... 어디 갈 데도 없을 텐데.”
“오는 중이겠지요. 대문간으로 한번 나가볼게요.”
수는 그렇게 말하고 대문을 나섰다.
노을빛이 잔잔히 깔린 골목, 수는 천천히 큰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꺾어지는 담벼락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러시면... 제가 아씨 뵐 면목이 없습니다. 다시는 저를 찾지 마세요.”
금이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들려온 건 현서의 낮고 또렷한 말이었다.
“수 낭자에게는 파혼하겠다고 이미 전했소.”
금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무슨 해괴한 말씀이십니까? 아씨께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저는 앞으로 무슨 낯으로 아씨를 뵙는단 말입니까?
도련님께서는 지체 높은 대감댁 자제이시면서, 어찌 인륜지대사를 그리 가볍게 말씀하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현서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만큼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이 진실하고, 단호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답지 않게 낮고 정제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수 낭자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누이 같은 분이에요. 내게는... 가족 같은 애틋함일 뿐이오.
하지만 그대를 향한 마음은... 이미 내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소. 나도 아버지가 무서워서 마음을 접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는 걸, 어쩌겠습니까.”
거기까지 들은 수는 담장 뒤에서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발소리조차 죽인 채, 말없이 의원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며칠 뒤, 진우와 수는 함께 책방에 들러 종이와 붓을 샀다. 진우는 수의 손에 잘 맞는 붓을 하나 골라 들더니, 말없이 값까지 대신 치렀다.
책방을 나서며 수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의원님댁에 신세도 지고 있는데, 이렇게 붓까지 사주시다니... 죄송해서 어쩌죠."
진우는 점잖은 얼굴로 은근히 생색내는 표정을 지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별말씀을...”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고마워서, 수는 킥킥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개울 너머를 보던 수의 눈이 커졌다.
"어라... 저기, 금이 언니랑... 현서 오라버니죠?“
진우도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끄덕였다.
"음... 도포 자락은 풀려 벗겨질 지경이고, 갓도 삐뚤어졌고... 그 꼴을 보니, 그대 정혼자 맞는 것 같소.”
"지금 농담하실 때예요? 사람들이 몰려있잖아요! 우리도 얼른 가봐요!"
수는 다급히 징검다리를 헐레벌떡 건너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금이 누이 서방이요! 성황당 앞에서 만났소! 버릴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시비요.“
현서가 앞으로 다가가며 소리쳤다. 주변에는 사람들이 둥글게 빙 둘러서 있었고, 그 중심에는 삐쩍 마른 키 큰 사내가 서 있었다.
"저년이 서방 몰래 바람이 나서 나간 거야!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남의 계집을 데려갔으면 값을 치러야지! 값을 치루라고!"
그 사내는 낮술을 한 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말은 혀가 꼬부라질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뭐! 찾으러 다녀? 그 입에서 거짓말이 청산유수네!“
화를 억누르지 못한 수가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진우가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뒤에 세웠다.
그는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며,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이 부인은 아무 잘못도 없소. 이 여인은 당신과 당신 부모에게 쫓겨난 것이오. 사흘 내내 대문 앞에 서서 들여보내 달라 애원했지만, 당신도, 집안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소.
그 절박한 순간, 금이 부인이 할 수 있었던 게 무엇이었겠소. 아마도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성황당 앞에 섰을 겁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자유의지’로 이 남자를 따라나선 것이오.
성황당 앞에서 혼인을 파기 당한 여인은 이미 제도 밖으로 내쳐진 몸입니다.
그런 여인을 두고 불륜이라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오.”
진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더 트집을 잡는다면, 내가 관아에 상소를 올리겠소.“
진우의 단호한 말에, 주변에 있던 사내의 지인들이 황급히 나서서 그를 말렸다.
”그만 가자. 이쯤에서 됐다.“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그때,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금이가 품에 안고 있던 작은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서 가위를 꺼낸 그녀는 말없이 저고리의 옷고름을 싹둑 잘랐다.
잘린 옷고름이 사내 앞에 던져지자, 금이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저도 당신을 버리고, 혼인을 파기합니다. 다시는... 저를 찾지 마세요.“
모두가 잠든 한밤중, 현서가 숨을 헐떡이며 의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는 두리번거릴 틈도 없이 곧장 진우가 자고 있는 사랑채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이불을 들추고 그대로 그 속으로 파고들어 누워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서의 집에서 보낸 머슴과 살림을 맡은 마름이 대문을 두드렸다.
"밤늦게 송구합니다. 혹시, 도련님 이곳에 계십니까?
영감마님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 제발, 도련님 좀 돌려보내 주시지요.”
마름은 난감한 얼굴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진우가 문 안에서 차분히 대답했다.
"댁의 도령이 내 집에 왔단 말이오?
지금은 너무 늦은 시각이니, 날 밝으면 돌려보내겠다 전하시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게!"
그리고는 마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랑채 쪽으로 돌아섰다.
"어제 저잣거리에서 있었던 일이... 아버지 귀에 들어갔나 봐. 집을 들어서자마자 날 찾더니, 같이 죽자며 목을 조르시더군. 지금 이렇게 살아 도망쳐 나온 것도, 그야말로 천우신조지...”
현서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모두 기가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더니, 진우에게 간청했다.
"배 한 척만 구해 주게.
아무래도... 금이 누이랑 조선에서 살긴 틀린 것 같아.“
그러더니 품속을 뒤적이며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이건 할아버지께 유산으로 받은 내 명의의 땅문서네. 팔아서 현금으로 바꿔 주게. 자네밖에... 믿을 사람이 없네."
방 안에 있던 이들 모두, 이 급박한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 온 현서의 치밀함에 절로 혀를 내둘렀다.
"금이 언니, 내일 마포나루에 배를 준비해 두기로 했어요. 어디로 가시든, 언니는 분명 잘 살아가실 거예요.
그리고... 현서오라버니, 보기보다 믿음직스럽잖아요. 무엇보다,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니까요.“
수의 말에 금이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씨, 그건 말도 안 되는 말씀이에요.
제가 어찌... 그런 금수만도 못한 생각을 하겠어요. 부디, 두 번 다시 그런 말씀은 마세요.”
그러자 수는 금이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언니가 현서 오라버니를 마음에 두고 계신 거...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오라버니가 일부러 옷 찢어 바느질해 달라 떼를 써도, 언니는 늘 퉁명스럽게 거절하셨죠.
그런데 막상 그분이 벗어놓고 간 옷은 몰래 주워 꿰매고, 정성껏 수놓아 깨끗이 빨아두셨잖아요.“
수는 금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한테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누구와 부부가 될지... 제 의지로 선택하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금이는 말없이 수를 껴안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마포나루의 가을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수는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금이의 어깨에 살며시 걸쳐 주었다.
잠시 수의 손을 꼭 잡고 있던 금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씨가 쓰고 있는 그 책에... 제 이야기도 남겨 주세요. 그렇게라도 아씨의 기억 속에 남아, 함께 있고 싶어요."
수는 금이를 단단히 끌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꼭, 기록할게요.
언니의 이야기를... 소중히 남겨둘게요.“
이윽고 닻이 올랐다. 어두운 강물 위로 배가 미끄러지듯 나아갔고, 사공은 묵묵히 노를 저었다.
진우와 수는 마포나루 선착장에 나란히 서서, 멀어져 가는 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붉은 해가 강물 위로 떠 오를 때까지, 두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야기는 <5화-진, 달, 래>로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