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동(지금의 인사동) 일대 책방 몇 곳을 기웃거렸을 뿐인데,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장이 서는 날이라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섰건만, 하루는 참으로 짧았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된 거지? ‘
수는 손가락을 꼽아 날짜를 대강 세어보았다.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 있었다. 얼떨결에 점이와 아기를 따라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혹시 집에서는 내가 실종됐다고 신고라도 한 건 아닐까?
그날, 분명 고서적을 펼치다 뭔가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데...
그 책, 누가 쓴 거지? 교토 어디 절에서 보냈던 책이었지, 아마.
대체 무슨 내용을 적어놨기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냐고요. 그보다, 그 책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찾으려 해도 도무지 실마리가 없다.
“아... 엄마 보고 싶다. 웬수 같은 오빠도...”
하늘에 둥실 떠 있는 달을 올려다보던 수의 눈가에, 불쑥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커다란 나무 아래 놓인 넓적한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럴 땐 맥주가 딱인데... “
수는 장에서 사 온 엿 봉지를 옷 속에서 주섬주섬 꺼냈다.
호박엿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쫀득한 식감과 함께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조금 전까지의 울적한 기분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역시 웰빙 음식이 최고야..."
엿을 하나 더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수는, 문득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싸한 기운을 느꼈다. 그 순간, 울긋불긋 줄이 쳐진 큰 나무 뒤편에서, 흰 소복을 입은 듯한 여자의 형체가 그림자처럼 어른거렸다.
수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그리고-
젊은 여자와 눈이 딱 마주쳤다.
'처, 처녀귀신...?‘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내달리는 수.
그러자 그 그림자 같은 여자가 그대로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왜... 왜 따라오는 거예요...”
달리던 수는 허겁지겁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혹시... 엿? 엿이라면 여기 있어요! 먹고 그냥 떨어져요!"
그녀는 손에 쥔 엿을 뒤로 내던졌다.
"툭!"
"아야-!“
엿에 맞은 듯, 여자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앞서 달리던 수는 그 소리에 놀라 발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물기 어린 눈을 한 조그마한 여자가, 바닥을 짚고 일어서며 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수는 순간 당황해 숨이 턱에 막히도록 달려, 의원 쪽으로 향했다. 그때 마침 집을 나서던 억쇠 어멈과 마주쳤다.
"왜 이리 늦으셨어요? 의원님이 걱정하셔서 찾으러 나가셨는데... 못 만났어요?"
말을 잇던 억쇠 어멈이 불현듯 멈칫하더니, 수의 뒤쪽을 힐끗 보고 눈짓을 했다.
’누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방금 전, 그 그림자 같은 여자가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헉!'
수는 본능적으로 담벼락에 몸을 바짝 붙였다.
그러자 여자가 살며시 다가와 수 옆에 서더니,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황당 앞에서... 서방님과 눈이 마주쳤어요. 그래서 서방님을 따라왔습니다."
"... 서방님? 나!"
수가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가리키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억쇠 어멈이 펄쩍 뛰며 수를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아이고야, 눈을 마주쳤으니 이걸 어째!
그러게 왜 자꾸 의원님 옷을 입고 나가시냐고요.
그나저나 이걸 어쩌면 좋데...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소박맞은 그쪽도 참 딱하지만...
여긴 실성한 양반댁 아씨여요!”
여자는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리더니, 수를 향해 절박하게 외쳤다.
"정말... 실성한 아씨세요?"
"그렇다고 하네... 내가."
수가 담담히 대답했다.
마당 한쪽, 어둠이 내려앉은 구석에서 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황당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알록달록한 오방색 줄이 여기저기 걸려 있던 곳이었는데...“
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곳이 성황당입니다.”
진우는 짧게 단언하더니, 이어지는 말에 잠시 망설였다.
“억쇠 어멈 말로는... 눈이 딱 마주쳤다고 하던데...“
"엿 먹다가... 뭔가 느낌이 싸해서 돌아봤더니, 그만...“
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진우는 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뭐라 딱 잘라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성황당 앞에 서 있던 소박맞은 여인과 눈을 마주친 사내는, 그 여인을 책임져야 합니다."
"...내가? 난 여자인데요? 그리고 지금 여기가 현실인지 꿈인지도 모르겠는데, 누가 누구를 책임져요?”
수는 어이없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을 바라보던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올해가 삼재인가... 왜 이렇게 난제만 겹치는 건지...“
다음날, 여인은 작은 보따리를 품에 꼭 안은 채 수와 함께 의원 약방으로 향했다.
약재를 다듬던 진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준비했다. 따끈한 찻잔이 수와 여인의 앞에 놓였다.
여인은 말없이 찻잔을 받아 들었다. 수도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슬쩍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자신보다 몇 살은 많아 보였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나? 아직도 젊은데...
이 시대에서 이혼은 큰일일 텐데.”
그때 진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수낭자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수가 눈빛으로 '뭘?' 하고 묻자, 진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서촌 댁이... 갈 곳이 없답니다. 혹시 무슨 묘안이라도 있으신가 해서요."
"서촌댁? 그게 그쪽 이름이에요? 부모님이 왜 그런 이름을...
그럼 ’촌댁 언니‘라고 불러야 하나?“
수의 말에, 진우는 황급히 차를 넘기다 그만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그 틈을 타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제 친정이 서촌이라...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
"아- 사극에서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서촌댁‘은 이미지랑 좀 안 맞아요. 그래! 이름! 이름은 뭐예요? 나이는요? “
여인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수줍게 대답했다.
"금이입니다. 나이는... 스물다섯이고요."
"와-, 동안이시네!
아무튼, 이렇게 어려 보이는데 ’서촌댁‘이라니...
왠지 좀 아줌마 같잖아요. 금이 씨... 아니지, 나보다 언니니까 ’금이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괜찮죠? 금이 언니?“
금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지금은 호칭 보다 거쳐 문제가 더 급한 것 같습니다만..."
진우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갈 곳이 없다 하셨잖습니까. 전, 당분간 이곳에 머물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는데... 금이 언니도 그렇게 생각하신 거지요?"
금이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금이에게 수의 맞은편 방에서 당분간 지내라고 일렀다.
이른 저녁을 함께한 뒤, 수와 금이는 마루에 나란히 앉아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도 달빛 속에서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사진 찍어 인스타에 올렸으면 백만 좋아요는 넘었겠다...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풍경인데.‘
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옆을 보았다.
금이 역시 말없이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풍습이 그렇다 해도...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무작정 따라와요?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요?"
수의 말에 금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수를 바라보았다.
"...절박했거든요.“
그 짧은 한마디에, 수는 답을 찾지 못한 채 시선을 다시 밤하늘로 돌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친정으로는 갈 수는 없었어요.
친정어머니는 시집가기 전부터 늘 그러셨어요.
’딸은 출가외인이다‘... 신신당부하셨죠.”
금이는 말을 멈추고,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마당을 바라보았다.
"남의 사정을 캐묻는 건 실례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성황당 앞에 서게 된 거예요?"
수의 물음에 금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를 낳지 못했어요...
혼례를 올린 지 십 년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아이가 없었죠."
"그럼... 꽤 일찍 시집갔네요.
신랑하고는 사이... 괜찮았어요?"
금이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우리는...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초야도 치르지 않았어요.“
"초야?”
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금이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 첫날밤? 맞죠?
그럼... 언니 아직... 모태솔로? 처녀라는 거죠?"
금이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
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남편에게 무슨 병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니면 뭐, 독특한 취향이랄지... 짐작되는 거라도...”
금이는 천천히 손을 내리고 수를 바라보았다.
"잘 모르겠어요.
서방님은 가끔 여자가 싫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를 보면 죄책감으로 숨이 막힌다고도 했고요.
술을 드신 날이면... 제발 집을 나가 달라고 애원하곤 했어요.
며칠 전, 시어머니가 그 모습을 보셨고... 그리고는 저를 불러, 친정으로 가라고 하셨어요.“
말을 잇던 금이는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 듯,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껌뻑였다. 애써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이미 눈가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수는 말없이 다가가 금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었다.
"울어도 돼요. 마지막 눈물이니까. 실컷 울어요.
내일 해는... 내일 또 떠오를 거예요.”
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이는 수의 품에 안겨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와- 어떻게 이렇게 몸에 딱 맞지? 언니, 바느질 솜씨 진짜 끝내줘요!“
수는 금이가 손본 옷을 입고 방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진우의 옷은 크고 헐렁해 불편했는데, 새로 손질한 옷은 몸에 꼭 맞아 가볍고 움직이기 편했다. 마치 원래부터 수의 옷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몸에 착 감겼다.
"그런데... 이 옷들은 어디서 난 거예요?"
"억쇠 어멈에게 의원 나리 어릴 적 입던 작은 옷이랑 안 입는 옷 좀 달라 했더니 주시더라고요.
그중 쓸 만한 걸 골라서 아씨께 맞게 고쳐봤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저도 기쁘네요."
금이는 미소를 지으며 바늘에 실을 끼웠다.
"금이 언니는 바느질 전문가예요.
헌 옷을 새 옷처럼 만들다니, 이건 거의 재능이죠“
수가 엄지를 척 치켜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근데... 지금 만드는 건 뭐예요? 앞치마?"
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 짓고 남은 천이 있어서요. 억쇠 어멈께 드릴 앞치마를 만들고 있어요."
말을 마친 금이는 바늘통에서 색실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천 위에 수를 놓기 시작했다. 자두꽃 세 송이가, 금이의 손길을 따라 천 위에 예쁘게 피어났다.
"뭐 하러 나한테까지 정성을 써... 귀한 색실까지 넣어 수를 놓았네.
암튼, 주는 거니까 내 곱게 쓸게."
기뻐하며 웃는 억쇠 어멈의 말에, 금이는 수줍게 미소를 짓고는 조용히 부엌을 나섰다.
※이야기는 <3화-고서적>으로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