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프롤로그

by 릿다


문 앞에 놓인 택배를 들어 올리니 제법 묵직했다.

얼마 전, 일본의 옵션 경매 사이트에 조선 말기로 추정되는 고서 한 권이 올라왔었다.

작자 미상에 보존 상태도 좋지 않아 가격이 저렴했기에, 결국 충동적으로 낙찰받은 책이었다.


'시리즈였나? 왜 이렇게 무겁지?‘

방 안으로 들고 들어와 종이 박스를 열자, 뚜껑 달린 작은 나무상자가 들어있었다. 상자는 종이테이프로 단단히 봉인돼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꽁꽁 싸맨 거야...“


당장 열어볼 마음은 들지 않았다.

수는 상자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샤워하러 들어갔다.

식사를 마친 뒤, 차 한잔을 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은 수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커터칼을 들어 종이테이프를 벗겨냈다.


뚜껑을 여니,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고서 한 권 들어있었다. 표지는 손상이 심해, 맨손으로 만져도 될지 주저될 정도였다.

수는 살며시 첫 장을 넘겼다.

'...당...기'- 제목의 앞부분이 희미하게 지워진 글자가 언뜻 눈에 들어오는 순간, 사방이 갑자기 깜깜해지며 휘몰아치는 바람이 휙- 하고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나와 봐!"

수는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뭐지? 이 이상한 공간은?“

"너, 꼴이 그게 뭐냐? 정혼자가 집을 나갔다고 끝내 실성을 한 게야? "

어떤 중년 부인이 어이없다는 듯 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나?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런데... 다들 옷차림이 왜 이래? 분명 방문을 열었는데, 여긴 거실이 아닌데... 뭐지?'

"...설마, 엄마가 드라마 세트장으로 집 빌려주신 거예요?“


밥상에 둘러앉은 여자들이 넋이 나간 듯 입을 벌린 채 수를 바라보았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계집종 차림의 어린 소녀가 숭늉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수를 보곤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이고, 우리 아씨가 정말 실성을 해버렸네... 이를 어쩌면 좋아...“

그러곤 허둥지둥 수의 짧은 단발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말했다.

”아씨, 머리카락을 왜 자르셨어요?“

"놔- 내 머리가 어때서 그래? 난 이 집 딸이라구! 배우도 아니라고!”

"아씨가 대감마님 외동딸인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러세요. 실성을 해도 단단히 하셨네, 우리 아씨..."





(가족회의)

"그러니까, 지금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 한양이라고요?“

수의 말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침내 수의 어머니라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실성이 아니라 치매 아니냐? 왜 기억을 못 하는 병 있잖니.."

말을 잇던 중년 부인은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아이고, 이럴 어쩌면 좋아!“

그녀는 뒤돌아 앉아 한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그러자 새언니라는 젊은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님, 아무래도 의원에게 보여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님 아시면 충격이 크실 텐데요..."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이 아이 머리 꼴 좀 봐라. 이래 가지고 대문 밖을 어떻게 나서겠느냐. 또 어느 의원을 찾는단 말이냐. 삼월아, 너는 아씨가 이렇게 될 때까지 대체 뭘 한 게냐! “

구석에 앉아 았던 삼월이는 고개를 떨군 채,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만 꼬아 비틀었다.


그때 새언니가 얼굴을 찡그리며 낮게 속삭였다.

"아버님 들어오시기 전에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어머님"

온 집안의 여자들이 화근덩어리라도 본 듯, 일제히 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건 나라고요. 내가 왜 당신들이랑 이러고 있는지, 나야말로 알고 싶다구요!’

수는 속으로 절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새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 친정 오라비가 의원이지 않습니까?"

"맞다. 네 오라비가 의원을 하고 있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중년 여인이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제 오라비는 입이 무거우니 믿고 의논해도 됩니다. 제가 아가씨를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어서 다녀오거라! 대감 오시기 전에 데리고 나가는 게 좋겠다. 그리고 이참에 의원 댁에 며칠 머물게 해라. 머리 모양이 이 지경이니, 어찌할 방도를 찾을 때까지...”

중년 부인은 손을 부산스럽게 놀리며 옷가지를 챙겼다.

그때 수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못 가요! 무슨 병원인지도 모르는데, 입원부터 하라니요! 여기 있어야 집에 다시 돌아가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그녀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밖에는 드라마 시대극에서나 볼 법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마당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수는 다시 방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뺨, 한번 쳐 보세요!"

'짝-'


아팠다. 너무.




( 입원)

"그러니까... 수라는 이름만 같고, 가족들이 누군지는 모르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수의 오라비의 처남이라는 의원은 잘생긴 얼굴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요. 문을 열고 나왔을 뿐인데... 이렇게 여기 와 있더라고요. 더 이상한 건, 이곳 사람들은 저를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혹시 말로만 듣던 그 평행이론? 도플갱어? 그런 걸까요, 의원님?“

의원은 잠시 말문을 고르듯 더욱 신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지금 마음이 혼미하신 듯합니다. 당분간 지켜봐야겠습니다. 사돈어른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방에 가서 쉬고 계시지요.”


입원실은 온돌방이었다.

한지 장판이 깔린 바닥, 흙벽이 드러난 벽에 대나무 옷걸이가 빨랫줄처럼 걸려 있었다.

수는 불편한 치마와 저고리를 훌렁 벗어 대나무 옷걸이에 걸어 두고, 방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야? 난 어떻게 여기 오게 된 거지? 나랑 똑같이 생긴 딸은 어디 있는 거야? 설마... 서울 우리 집에?

아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지? 정말 모든 게 미스터리하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오다니...‘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아낙이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러다 수를 보자 기겁을 하듯 눈을 크게 뜨더니, 황급히 나갔다.


"대낮에 어찌 옷을 벗고 계세요? 사대부집 아씨가... 참말로.“

아낙은 밥상을 문 앞에 내려두며 덧붙였다.

”밥상은 여기 두고 갈 테니 채비하시고 드셔요.“

아낙이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수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얇기는 해도 속적삼에 속바지 두 겹, 그 위에 치마까지 입고 있었는데... 그게 ’옷을 벗은‘ 꼴이라니.

귀찮았지만 겉옷을 다시 걸쳐 입고는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는 마루에 앉아 밥을 먹었다. 아낙의 솜씨가 좋은지 국과 찬이 제법 맛있었다.

”음... 맛있네!“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는데, 마당으로 들어서던 사람들이 못 볼 것을 본 듯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돌아 나갔다.


밥을 다 먹은 수는 상을 들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가마솥의 물기를 닦고 있던 아낙은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 행주를 내던지고 문간으로 달려 나왔다.

"아씨, 상은 그냥 마루에 두시지요. 이렇게까지 갖고 나오시면..."

"당연히 제가 갖고 와야죠.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릇은 어디서 씻나요?"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누가 들으면 귀한 집 아씨가 실성을 했다고 하겠네.

나도 참 그래서 의원에 오셨다고 했지. 아무튼 정신도 온전치 않으시니, 얼른 방으로 들어가 계셔요.“


"음... 말씀을 그렇게 하시니 하는 말인데, 사실 저도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요. 마음도 그렇고, 밥도 먹었으니 주변을 좀 둘러볼 겸 산책을 하고 싶은데...

어디 걸을 만한 곳 없나요?"


"산책? 그게 뭐시다요?"


"그러니까, 조용히 걷고 싶을 때 가는 곳이요.“

"... 의원 나리께서 가끔 뒷산에 오르시기는 합디다. 하지만 곧 날이 어두워질 테니, 산에는 가지 마셔요."

수는 알겠다는 듯 손을 흔들고 의원을 나섰다. 산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뒷모습이 대문을 지나자, 불안해진 찬 간의 억쇠어멈은 대문간을 한참 바라보다가 곧장 의원 진우에게 달려갔다.


"왜, 이 대감댁 실성한 아씨 말이여요!

부엌에 와서는 밥상을 들고 한참을 서 있더니, 글쎄 휘적휘적 걸어서 의원을 나가 버리더라구요.

암만해도 뒷산 쪽으로 간 것 같던디... 이러다 큰일 치는 거 아니겠지요?"





※이야기는 <1화-도깨비아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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