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은 평지처럼 완만하게 이어져 걷기에 좋았다.
오랜만에 듣는 새소리,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선 듯했다.
덩굴처럼 뻗은 나뭇가지들이 사방을 뒤엉키듯 얽혀 있었고, 수는 손을 들어 덩굴을 툭툭 쳐내며 길을 열었다.
그러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작은 평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는 마치 막힌 가슴이 확 열리는 것 같은 기분에, '야호!'라도 외쳐볼까 싶어 두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때였다.
평지 끝 어귀에서 어렴풋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의 방향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한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은 채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놀란 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여자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주저 없이, 여자의 몸과 아기를 한꺼번에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여자는 뒤로 휘청이며 수와 함께 바닥에 넘어졌다. 수 위로 넘어지듯 쓰러진 여자는 아기를 꼭 안은 채, 한동안 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뛰어내리려던 거죠?“
수의 말에 여자는 눈물로 붉어진 눈으로 수를 흘겨보았다. 말없이, 울음기 어린 숨만 내쉬며 아기를 더욱 세차게 끌어안더니 다시 벼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안 된다고요!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애까지 데리고 죽어요?“
수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고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사람이 달려와 여자를 힘껏 끌어당겨, 세 사람을 평지 쪽으로 밀어냈다.
놀란 수는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 의원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리고는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잘 오셨어요. 아무래도 이 아기 엄마, 여기서 뛰어내리려던 것 같아요. 제발 좀... 말려 주세요.“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말해 보세요.
말로 꺼내 놓으면, 별거 아닐 수도 있어요."
수는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는 짧은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그래도 제가 그쪽 생명의 은인인데, 무슨 말을 해도 도와주지, 해코지하겠어요?“
여자는 잠시 입술을 떨었다.
그러다 마침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사람들이... 아씨가 실성했다고들 합디다.“
수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참!
사실 저도... 사정이 좀 있어요. 그런데 그쪽 입장에선 오히려 잘된 거 아닐까요?
제가 실성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면, 뭐든 털어놔도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잖아요. 말해도 퍼지지 않고, 믿지도 않을 거고요.”
수는 다시 살짝 웃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상담자가 어디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때, 아기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듯,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아기... 젖도 좀 주고 그러세요. 기저귀도 갈아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 퀴퀴한 냄새 나지 않아요?“
수가 아이 쪽으로 다가가려는 순간,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시라구요!"
"아이고, 깜짝이야... 소리 지르면 아기도 놀라요. 엄마도 지금 배가 고파서 더 예민한 거겠죠. 전... 부엌에 가서 뭐라도 있는지 좀 보고 올게요."
수는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왔다.
얼마 후, 수와 진우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자, 여자는 아이를 안은 채 구석에 앉아 있었다. 다행히 아기는 젖을 먹고 난 뒤인지 더는 울지 않았다.
수는 밥상을 조심스럽게 그녀 앞에 놓았다.
그러나 여자는 한참 동안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수는 살며시 수저를 그녀 손에 쥐여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좀 드세요. 그래야 기운을 차리죠.“
그제야 여자는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아이를 낳으신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어쩌다 저 험한 산길까지 오르신 겁니까?"
진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관아에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에 여자는 숟가락을 든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수저 위로 번졌다.
한참을 말없이 흐느끼던 그녀는, 마침내 수를 바라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은... 몇 대에 한 번씩 도깨비 아기를 낳아요. 이번엔... 제가 낳은 아기가... 도깨비예요."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도깨비요? 그 동화책에 나오는, 그 도깨비 말씀이세요?"
수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감싼 천을 젖히며 물었다.
아기를 본 진우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놀란 눈길이 곧바로 수에게로 향했다.
"아니, 똘망 똘망 잘 생겼구만! 뿔도 없고, 꼬리도 없는데 무슨 도깨비예요. 하하하. "
수는 아기의 볼을 살짝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우와 여자는, 실성한 사람이라도 본 듯 멍하니 수를 바라보았다.
"물론, 조선에서는 이런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버지가 다른 나라 분이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요. 혹시... 어느 나라 분이세요?”
"...조선사람이에요."
여자가 거의 들리지 않을 듯 낮게 대답했다.
"음... 그럼 선조 중에 외국인이 있었던 건가?
왜, 그... 멘델의 유전 법칙이라고 있잖아요. 몇 대를 건너서 우성인지 열성인지 나타나는...“
진우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황급히 수를 방 밖으로 끌어냈다.
"내가 어렵사리 구한 서역 의학서에, '메데'라는-"
"멘델이요."
수가 바로잡았다.
"그래, 멘델! 맞다. 그 이야기를 얼핏 본 기억이 있긴 한데... 수 낭자는 어찌 그런 걸 알고 계시오?”
"제가 아는 게 좀 많거든요.“
수는 익숙한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아이가 서양인의 피를 조금 물려받았다고 해서 도깨비라니요. 나중에 그 아이가 이 얘기를 알게 되면...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수도 있어요.“
진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수 낭자께서 서역 말과 그 지식에도 밝으신 듯하나, 지금은 말씀을 조금 아껴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여인이... 몹시 혼란스러워 보이고, 충격도 큰 듯합니다.”
그는 잠시 수를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제가 서책을 읽게 되면, 그 뜻을 좀 풀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뜻도 어렵고, 읽는 데 자꾸 막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요.
그 대신- 저 여인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정말 사실인지 아닌지, 함께 밝혀주셔야 해요.“
진우는 잠시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나무통에 따뜻한 물을 받아 아기를 씻겼다.
새까만 피부를 가진 사내아기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집안에 도깨비 아기가 태어난다는 말, 어디서 들으셨어요?“
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 시집가기 전날, 어머니께 들었어요. 어머니도 시집가기 전날, 외할머니께 들으셨다고 했고요.
어머니 외가 쪽 집안에서는 그 이야기를... 금기처럼 여겨 조심스럽게 전해 내려왔다고 해요.
몇 대에 한 번씩, 여자들이 도깨비 아기를 낳는 저주에 걸린다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아기를 낳은 여인들 가운데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아기와 함께 목숨을 끊은 경우도 있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점이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터뜨렸다.
"근거 없는 말이라도... 그 마음은 이해가 돼요.
하지만 정확한 사실 확인도 없이, 아기의 생김새만 보고... 새 생명을 해치려 하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미안하지 않아요? ”
수는 아기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점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봐요. 엄마를 닮아서 피부도 곱고, 눈매도 꼭 빼닮았잖아요.
앞으로 절대... 나쁜 생각하면 안 돼요. 엄마는 강하니까. 파이팅!“
수는 힘차게 웃으며 점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점이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국을 떠 입에 넣었다.
아기가 목욕한 나무통을 우물가로 가져가 씻고 있는데, 찬 간의 억쇠 어멈이 다가왔다.
"이런 일은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나 하는 거지, 어찌 손수 하십니까?
양반 아씨께서 허드렛일을 하시면, 아랫사람들이 흉을 봅니다. 안 그래도 말이 많은데...
앞으로는 제가 애기 엄마 시중을 들 테니, 아씨는 얼른 방에 들어가 쉬시면서 병환이나 돌보세요."
"정말요? 그래 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지요!"
"...말도 하대하시고요. 양반이 아랫사람한테 높임말을 쓰시면, 저희가 오히려 불편합니다.”
“연장자시잖아요. 그 정도 예의는 있어야죠.”
수는 웃으며 나무통을 건네고는, 이내 목소리를 낮췄다.
"그보다... 아기 엄마 방에서 보고 들은 건,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이 집 주인인 진우 의원님 뜻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이른 새벽부터... 아기 엄마 친정까지 같이 가자고 하시는 겁니까?“
"네-!“
진우가 눈을 흘기며 물었다.
"헌데... 지금 입고 계신 옷, 혹시 내 옷 아니오?"
수는 멋쩍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 짧은 머리로 의원님과 같이 다니면, 사람들이 누구를 흉보겠어요? 제 나름... 작은 배려라고 생각해 주세요. 하하"
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한나절을 걸어 도착한 곳은 아기 엄마 점이의 친정집이었다. 농사철이라 그런지, 삽작문을 열고 들어서도 집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쩌죠?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요."
수는 부엌과 집 뒤 텃밭을 슬쩍 둘러보다가 중얼거렸다.
수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진우는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목을 축였다. 이내 그 물로 손을 씻고, 도포 소매 속에서 꺼낸 하얀 천으로 손을 꼼꼼히 닦았다.
그때, 나이 든 아낙이 광주리를 이고 집으로 들어섰다.
부엌 근처에 광주리를 내려놓은 아낙은 낯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뉘신지...?"
"윗마을로 시집간 '점이'라는 딸이 있지요?"
진우가 차분히 물었다.
아낙의 얼굴이 일순 굳더니, 곧 놀라움이 번졌다.
"점이가... 애를 낳다가 사라졌다고, 어제 서방이 와서 그러더군요. 혹시 점이 일로 오신 건가요? 점이는... 살아 있는 겁니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기색이 아낙의 얼굴에 번졌다.
"아기도 산모도 건강합니다."
"...아기요?"
"네, 그 일로 찾아왔습니다.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순간, 아낙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더니 태도가 돌변했다.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쌀쌀맞게 목소리를 높였다.
"난... 난 아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서 가시오! 우리 바깥어른이랑 아들이 오기 전에, 어서 나가요!“
"아주머니, 따님의 아기는 외손주예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지도 않으세요?"
수의 물음에, 아낙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갔다. 이내 그녀는 두 사람을 밀어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몰라요! 나는 정말 모른다구요!
바깥양반 성격이 불같아서... 이 일 알면, 우린 다 죽어요. 그러니 제발... 어여 가세요. 어서요!”
아낙은 울음을 터뜨리며 부엌으로 달려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진우와 수는 당황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집을 나섰다.
”이제... 어쩔 셈이요?“
진우가 낮게 물었다.
수는 뒤돌아 점이네 집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꼭 알아봐야겠어요.“
그 말에, 진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
그는 힐끔 수를 바라보았으나, 곧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은 터덜터덜 길을 걷다가, 길가에 보이는 주막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성애라는 게 없는 걸까."
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우는 먼 산을 바라보며 낮게 대답했다.
"좀 전의 그 아낙은... 겁을 먹은 것이오.
집안에 수치스러운 딸이 있다는 걸 아비가 알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무지한 사람들이에요. 그 딸은 아무 죄도 없는데...“
수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때 주모가 다가와 물었다.
"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묵어가시렵니까?"
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산길을 이 밤중에 걸어간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저녁을 먹고, 우물가에서 손과 발을 씻던 수는, 삽작문 밖으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았다. 수건을 목에 건 채 나가 보니, 낮에 만났던 점이의 친정어머니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설마... 남편분에게 들키신 건 아니죠? 우린 정말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낙은 쭈뼛쭈뼛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너무 겁이 나서 그만...
염치없지만, 나리들께 부탁 좀 드릴려고 찾아왔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시죠. 길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하니."
언제 나왔는지, 진우가 뒤에서 조용히 말을 보탰다.
방 안에 들어온 아낙은 윗목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한참 동안 두 손만 만지작거리며, 좀처럼 입을 떼지 못했다.
기다리다 답답해진 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탁하실 말씀 있으면... 편히 말씀해 보세요. 점이와 아기는 지금 의원님댁에서 지내고 있어요.“
아낙은 진우를 한번 바라보곤,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우물쭈물 망설이며, 불안한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마침내 결심한 듯, 그녀는 품속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두 손으로 꼭 움켜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 친정은 아들이 귀한 집안이라, 대를 딸들로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딸들마저 시집을 가지 않거나, 비구니가 되거나... 늙은 대감댁의 재취로 들어가 자식 없이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그게다... 집안에 내려오는 저주 때문이지요."
"도깨비 아기 저주 말인가요?”
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낙은 놀란 눈으로 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
"알고 계셨군요...
저도 서른이 넘도록 혼처가 들어오지 않아, 혼례는 포기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지금의 남편이 돌림병으로 아내 둘을 잃고 오랫동안 새 사람을 들이지 못하다가 결국 저를 맞았지요.
시집와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시집을 가면서, 제 죄가 고스란히 아이에게 내려간 겁니다...“
아낙의 눈물이 종이 위로 뚝뚝 떨어졌다. 종이가 젖을까 걱정된 듯, 그녀는 서둘러 그것을 내밀었다.
수는 얼른 받아들며 물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부적입니다.
시집가는 딸에게 어미가 전해주는 것이지요. 점이에게 이걸 꼭 주려 했는데, 깜박했어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긴 건가 싶습니다. 늦었지만... 꼭 전해주세요."
아낙은 다시 고개를 숙이며 흐느꼈다.
수는 종이를 펼쳐 보았으나, 온통 한문이라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곧장 진우에게 건넸다.
진우가 조심스럽게 소리 내어 읽었다.
"교지.
서역에서 온 돌쇠와 유민석의 삼녀 금순의 혼례를 허하노라. 돌쇠는 충성과 절개를 겸비하였으므로, 금번 혼례를 예에 따라 행하도록 하라.
선조 이십칠 년 계미월.
...왕의 낙관도 찍혀있습니다.“
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역시! 집안에 서역인과 혼인한 이가 있었군요.
유전은 대를 건너 나타나기도 하고, 게다가 아이는 보통 어머니 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데...
혼혈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서 도깨비 아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수가 단호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진우도 차분히 거들었다.
"이 낭자의 말이 옳습니다. 나도 얼마 전 서책을 읽고 알게 되었지만... 조선 속담에도 있지 않습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아마 조상들이 이런 오해를 막으려, 대대로 이 증서를 보관해 온 것이겠지요.“
아낙은 눈물을 훔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우리 집안에... 정말 서역에서 온 분이 계셨단 말씀이세요? 도깨비가 아니라..."
진우가 다시 덧붙였다.
"여기 보니, 벼슬까지 하신 분이었군요. 자세한 건 내일 관아에 가서 확인해 보지요”
아낙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어두운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수와 진우는 마을 관아로 향했다.
이방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교지를 내밀었다.
“‘돌쇠’라는 분에 관한 기록을 찾고 싶습니다. 보관 창고에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방은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글쎄요... 창고 열쇠가... 어디 있더라? 생각을 좀 해봐야겠소.”
그러자 진우가 허리춤에서 전냥 주머니를 꺼내, 몇 냥을 골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방은 슬쩍 눈을 내리깔아 손안의 돈을 확인하더니, 열쇠 꾸러미에서 하나를 빼내 건네며 고개로 옆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열어 보시지요.”
창고는 사실, 굳이 열쇠가 필요 없을 만큼 허술했다.
덜컥-
잠금쇠는 힘주어 돌리지 않아도 쉽게 풀렸다.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자, 곰팡내와 먼지가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책더미는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고, 습기에 절은 종이마다 곰팡이 얼룩이 가득했다.
진우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 한 권을 집어 들려던 그때-
마침 지나가던 포졸 하나가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이 마을 사람도 아니면서, 감히 관아 창고를 함부로 들락거린단 말이오?”
진우는 재빨리 교지와 열쇠를 내보이며 말했다.
“열쇠는 이방에게 받은 것이오. 그리고 이 교지에 적힌 ‘돌쇠’라는 인물의 기록을 찾으려는 중이요.”
그러나 포졸은 들을 생각조차 없었다.
열쇠를 힐끗 훑어보더니, 막무가내로 두 사람을 창고 밖으로 밀어냈다.
진우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막 출산한 여인의 목숨이 달린 일이오! 제발... 기록을 찾아야 하오!”
수도 간절한 목소리로 한발 다가섰다..
“방금 태어난 아기의 생명이 걸려 있어요.
혹시... ‘도깨비 아기’라는 말, 들어 보신 적 없으세요?”
그 말에 포졸의 손이 멈췄다.
그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깨비 아기는 모르겠고, 도깨비 포졸 이야기는 들어 봤소.”
포졸은 먼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 포졸들의 영웅이었지.
얼굴은 시커멓고, 활은 솜씨는 또 어찌나 대단했던지...
임진년에 왜구가 들이닥쳤을 적에도, 그 얼굴 덕분에 밤마다 적진을 드나들었다더이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들키지 않았다 하더군요. 왜놈들 사이에선 그를 ‘도깨비 포졸’이라 불렀다지요.
그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렸다는 소문도 있었소. 하하하.”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으신 겁니까?”
진우가 물었다.
“오래전부터 우리 마을 포졸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요. 나도 포졸이었던 아버지에게 들었지요.
그는 마을에 홍수 났을 때 다리 공사에 나섰다가, 그만 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더군. 그때 고을 원님이 무척 애석해하셨어, 임금께 상소까지 올려서 공덕비도 세워졌다 하오.”
“그 포졸이... 혹시 이름이 ‘돌쇠’였습니까?”
진우의 물음에, 포졸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렇소! 서역에서 온 돌쇠 포졸이었다 하오!”
수와 진우는 어두운 산길을 넘어오느라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진우의 갓은 삐뚤어졌고, 수의 옷자락은 바윗돌에 긁혀 너덜너덜했다.
의원 집 앞에 다다르자, 고성이 문밖까지 쩌렁쩌렁 울려 나왔다.
“저 애는 네 애가 아니여! 도깨비 새끼라니까!”
앙칼진 노파의 외침에 두 사람은 순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누구랄 것도 없이 발걸음을 재촉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방 안에서 사내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니, 제발 그런 소리 마세요. 아이가 어떻게 생겼든... 저는 제 자식이라 믿어요.”
노파는 마당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저년이 도깨비하고 붙어서 낳은 괴물이라니까! 정신 차려, 이 불출아!
애고 기집이고 다 내팽개치고, 다시는 상종도 하지 말아!
어서 집에 가자, 어서!”
벌떡 일어난 노파는 방 안의 아들을 거칠게 끌어내려 했다. 그러자 사내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가시려면, 엄니 혼자 가세요!
점이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그런 천벌 받을 말을 하세요?”
사내는 눈에 눈물을 그렁이며 마루 기둥을 붙잡고 버텼다.
“엄니 병으로 쓰러졌을 때, 똥오줌 받아낸 사람- 바로 이 사람이에요! 엄니가 그토록 바라시던 아들 손주를 낳았는데, 왜 이러세요. 도대체 왜요!”
그때, 소란을 구경하던 사람들 틈에서 억쇠 어멈이 수와 진우를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왔다.
“아이고,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꼴이 이게 뭐예요...”
진우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요?”
억쇠 어멈은 얼굴을 찌푸리며 낮게 대답했다.
“초저녁쯤에 웬 사내가 점이라는 사람을 찾길래, 여기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곧 저 노파가 들이닥쳐 이 난리를 치는 겁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파 앞으로 나섰다.
“모두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그러자 노파가 눈을 부라리며 버럭 소리쳤다.
“당신은 또 누구요?”
진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 의원의 의원이오.”
노파는 그 말에 움찔하며 아들의 팔을 놓고는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말은 잦아들었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분노가 서려 있었다.
수와 진우는 점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어둑했고, 점이는 등을 돌린 채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들릴 듯 말 듯 흐느끼고 있었다.
“자네가 점이 서방인가?”
진우가 묻자, 순박한 인상의 사내가 넙죽 엎드리며 고개를 숙였다.
“제 처와 아이를 돌봐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마루에 앉은 노파에게도 들리도록, 또렷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아기는 도깨비 아기가 아닙니다.”
진우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선대 조상 중 서양인이 있었기에 외모가 달라 보일 뿐입니다. 여기, 그 사실을 증명하는 왕의 교지가 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교지를 들어 보였다.
“점이의 고을 기록에 따르면, 그 서양인 선조께서는 홍수로 무너진 다리를 수리하다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그 공을 기려 마을에는 공덕비까지 세워졌지요.
즉, 이 아기는 나라와 마을을 위해 헌신한 집안의, 자랑스러운 후손입니다.”
사내의 얼굴에 안도와 기쁨이 번져 갔다.
“들으셨죠? 이 아이는 양인의 피를 이은 아이입니다. 도깨비도, 천한 피도 아닙니다. 나라에 공을 세운 훌륭한 선조의 피가 흐르는 아이라구요.
엄니, 이제 아시겠죠?”
점이를 천한 집안 출신이라며 멸시하던 노파는 민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교지는 점이의 친정어머니께서 직접 전해 달라며 제게 맡기신 것입니다.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이건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가 교지를 내밀자, 노파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품속 깊이 끌어안았다.
그 순간까지 등을 돌린 채 벽을 향해 앉아 있던 점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돌아앉았다.
그러고는 서방의 품에 와락 안기며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람아... 답답한 사람아...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얼마나 힘들었을까...
불쌍한 사람...”
“우리 아기... 도깨비 아니죠?
그쪽이랑... 지 피가 섞인, 우리 아기 맞죠?”
“암만, 틀림없는 자네와 내 자식이구만. 그러니... 어여 집으로 가자구.”
점이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아기를 낳은 뒤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 안의 아기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넌 도깨비 아기가 아니야... 엄마 아기야!”.
사내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받아 안고, 한 팔로 점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 따스한 품 안에서, 아기도 마치 아비를 알아보듯 입을 삐죽거리다가, 이내 “응아-”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야기는 <2화-성황당>으로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