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고서적

by 릿다


(고서적을 찾아서~ )

"여기 보세요. 호랑이처럼 생긴 조선을 지나 중국으로 들어가요. 고비사막을 건너고, 그다음엔 실크로드를 따라 쭉 가면... 프랑스, 그러니까 지금 말로는 ’서역‘이 나와요.”

수는 의원 마당의 흙바닥 위에 작대기를 꾹꾹 눌러가며, 조선에서부터 우크라이나를 거쳐 프랑스에 이르는 길을 진우 앞에 그려 보였다.


"수 낭자는... 이 길을 정말 걸어본 것이오? 서역에도 다녀오고?"

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음... 사실은 패키지로 9박 10일 다녀온 거예요. 쇼핑 말고는 기억나는 게 별로 없지만요."

"허허... 그렇게 짧은 날에 이 먼 길을? 여인의 몸으로는, 도무지 믿기 어렵소."

"인정해요. 지금은... 불가능하죠.“


진우는 한동안 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내 전부터 궁금했던 것이... 수 낭자는 실성했다 보기엔 사리 분별이 또렷하고, 말귀도 잘 알아듣소. 다만... 때때로 황당한 말을 하고, 서역 방언까지 섞어 말하니 혼란스럽긴 하지만...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때였다. 벌컥, 대문이 열리더니, 삼월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었다.


"아씨! 그동안 평안하셨어요? 병환은 좀 어떠시고요?"

"삼월이? 웬일이야!"

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삼월이는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평상 위에 툭 내려놓았다. 곧이어 그 뒤를 따라 수의 어머니가 대문을 들어섰다.


"삼월아, 눈 오는 날 강아지 마냥 혼자 그리 뛰면 내가 어떻게 따라가니. 좀 천천히 다니거라.”

삼월이는 멋쩍은 듯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 애교를 부렸다.

"아씨가 너무 오랜만이라서요... 죄송해요, 마님.“

수 어머니는 삼월이를 흘겨본 뒤, 이내 수와 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돈 의원께 아이를 맡겨두고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졸지에 이리 신세를 지게 되었네요.”"


진우는 손사래를 치며 겸손히 인사했다.

"아닙니다. 댁은 평안하시지요?"

"덕분에요.“

수 어머니는 건성으로 대꾸 하더니, 곧 수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좌우로 돌려 살폈다.

"그래도 축은 많이 안 났구나. 역시 사돈 의원의 손이 약손이었네."


진우가 권했다.

"날도 더운데 방으로 드시지요."

어머니는 수의 손을 꼭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방이 아담하고 참 좋구나. 사돈 의원께서 정성을 많이 들이신 게 보이네. 경황이 없어 부족한 딸을 맡기게 되어... 여러모로 송구합니다."


"별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따님께 배울 게 많아, 견문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수 어머니는 눈을 크게 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막힌 듯하다가, 이내 믿기 어렵다는 얼굴로 물었다.

"사돈 의원, 참 겸손하시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아이의 병세는 어떻습니까?“


수가 얼른 끼어들었다.

"장기 입원이 필요합니다."

어머니는 옆눈으로 딸을 흘겨보며 낮게 쏘아붙였다.

"말에 고물 묻을까 봐, 그리 서둘러 대답하는 것이냐... "

그리고는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하고 진우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특별한 증상은 없지만, 좀 더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대감마님께서 서두르지 않으신다면, 이곳에서 치료를 계속하시는 게 현명하겠습니다."


수 어머니는 답답한 듯 부채를 부치며 수를 바라보았다.

"올해 혼례를 올리기로 했는데, 정혼자는 집을 나가고... 애는 이 지경이 되고... 도대체 이 아이 팔자가 어쩌다 이리 꼬였는지 원...”

휘휘- 부채질하는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사돈 의원이 그렇다 하시니, 내 집에 가서 대감께 말씀드려야겠네요."


그러고는 옆에 앉은 수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대감께서 곧 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에 다녀오신다더라. 먼 길 떠나시기 전에 집에 한 번 들르실 터인데,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니?"

잠시 머뭇거리던 어머니는 시선이 딸의 단발머리에 닿았다.

“아니지... 저 머리 꼴을 보시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하구나. 그래, 대감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마. 너는 상황을 보아가며 집에 들르거라."


그 순간, 수는 교토에서 받은 책이 떠올랐다. 혹시, 그곳에 가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어머니! 저도 일본에 같이 가면 안 될까요?"


"네가 일본에? 너 진정 실성을 한 것이냐?

혼례도 올리지 않은 계집이 남정네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겠다니... 아이고, 속이 터져서 원..."

수는 어머니 곁으로 바싹 다가앉아,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얼굴로 애원했다.

"어머니... 집 나간 정혼자가 일본 어느 절에 있는지, 밤마다 꿈에 나타나 자기를 찾아와 달라 애원합니다. 그 몰골이 얼마나 참담한지... 차마 말씀드리기도 어렵습니다.”


"뭐야? 그게 정말이냐?“

수 어머니는 맥이 탁 풀린 얼굴로 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네가 어려서부터 그 정혼자를 연모했으니, 꿈에 나타난 걸지도 모르겠다. ’오라버니‘하며 따라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참 야속한 사람 같으니. 아들 나가고 삼천 배, 백일기도까지 드리며 정성을 쏟는 그 집 안주인 꿈에는 한 번도 안 나타나고, 너에게만 나타난단 말이냐...”


어머니는 한숨을 섞으며 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네가 일본의 용한 절에 가서 부처님 가피를 입고 싶어 한다고.. 대감께 말씀드려 보마.

헌데 이 꼴로는 의원 문밖도 못 나갈 텐데. 일본까지 과연 갈 수 있겠느냐?"

그때까지 모녀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진우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쓰개치마를 깊숙이 눌러쓰면 짧은 머리는 감출 수 있습니다. 병세 또한 제가 곁에서 잘 보살피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루빨리 정혼자를 찾아 혼례를 올려야, 수 낭자도 마음의 안정을 찾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수 어머니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진 듯, 오랜만에 개운한 표정이었다.


"암요, 사돈 의원 말씀이 옳습니다. 내가 대감께 잘 아뢰어 두 사람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곧 대감 퇴청하실 시간이니 어서 가봐야겠다.“

수 어머니는 삼월이를 앞세우고는 서둘러 의원을 나섰다.




남은 수는 능숙하게 지어낸 거짓말이 떠올라 양심이 콕콕 찔렸다.

"정혼자가 꿈에 나타난다니... 정이 깊으셨나 봅니다?"

진우의 말에 수는 눈을 흘기며 쏘아붙였다.

"거짓말인 거 아시잖아요? 그런데 의원님은 왜 그토록 일본에 가고 싶으신 건데요?“

진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으흠...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소. 전해야 할 뜻도 있고, 확인해야 할 일도 있고요..."


수는 게슴츠레한 눈길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수상한 냄새가 진동하는데요. 우리는 뭐고, 일본 누구에게 무슨 뜻을 전한다는 거예요?"

"그러는 수 낭자는 어쩌자고 절에 가겠다는 거요? 규중에 있어야 할 아씨가 먼 이국땅을 가겠다는 것도 괴이한데, 가고 싶은 곳이 하필 절이라니. 뜻밖의 언행은 익숙하오만, 이번만큼은 정말 놀랐소.”


수는 씩 웃으며 속삭였다.

"좋아요, 각자도생해요. 하지만 서로가 필요할 땐, 이유 묻지 말고 도와주기. 어때요?"

"좋소!“

수는 불쑥 손바닥을 내밀었다.

"뭐요? 그 요상한 동작은..."

"손바닥을 치시라고요. 협상이 성사됐다는 뜻이에요."


진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자기 손을 그 위에 포갰다. 순간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진우는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해 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출항)

일본으로 향하는 통신사단을 이끌 예정이던 예조 판서, 수의 아버지 이 판서는 전날 갑작스러운 급체로 부득이하게 일정을 포기해야 했다.

그를 대신해 젊은 관리 박영효가 이번 통신사단의 수장을 맡게 되었다.


배에 오르자마자 수와 진우는 곧장 박영효를 찾아가 인사를 올렸다. 선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짧은 콧수염을 기른 자그마한 체구의 젊은 관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 대감에게 전갈은 받았습니다. 진우 자네와 따님이 동행하신다고 들었지요.”

진우가 고개를 숙이며 정중히 답했다.


"조선에서는 아직 여인이 배에 오르는 것을 불길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낭자는 부득이 남장을 하였습니다. 대감께서 이끄시는 중요한 길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뜻에서 그리한 것이옵니다.“

박영효는 잠시 말없이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낭자의 깊은 생각을 존중합니다.

여행 중 불편한 점이 있거든 언제든 말씀하세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수는 감사의 인사를 올린 뒤 짧은 담소를 나누고, 진우와 함께 선실을 나섰다. 자신의 선실로 돌아온 수는 짐을 정리한 뒤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 진우의 방에서는 늦은 밤까지 어떠한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절과 동자승)

수와 진우는 교토 아라시야마의 긴 나무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에서는 염색공들이 말없이 손을 놀리며, 감빛으로 곱게 물들인 천을 헹구고 있었다. 그들의 손끝은 마치 말을 삼킨 듯 고요했고, 천 위의 색은 물결을 따라 천천히 번져나갔다.


예부터 일본에서는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염색공방이 나타난다 했던가. 그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전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 기억 속 한 조각과 겹쳐지는 듯했다.

그때-

천이 물을 가르며 스칠 때, 수의 귓가에 소리가 닿았다.


’사르락- 사르락.‘


비단이 여린 숨결을 흘리듯 건네는, 생의 마찰음.

수는 그 소리를 마음속에 새기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을 알 수 없는 대나무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리시야마 강을 건넌 지도 한참인데, 아직 절을 찾지 못하는 겁니까?"

진우의 조급한 목소리에, 수는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소는 분명 아라시야마 3쵸메였는데... 그렇다면 이 근처일 텐데. 그런데 왜 눈에 들어오는 건 대나무 숲뿐이지?

이길... 분명 와본 적이 있는데, 어쩐지 낯설지가 않아.‘


"보채지 말고 잠시만 따라와 보세요. 분명 이 근처예요."

수는 진우를 달래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산으로 이어진 나무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천국으로 오르는 길처럼 길게 뻗은 계단이었다.

숨이 차서 가슴이 따끔거릴 만큼 올라가자, 작은 절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반쯤 열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방문객을 맞는 작은방이 있었으나 텅 비어 있었다.

수와 진우는 고요한 마당을 가로질러 대웅전 쪽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 마루에서 스님 한 분이 걸어 나왔다.


"저희 절에는 조선어로 쓰인 서책은 없습니다. 혹시 그런 책이 있다고 들으셨습니까?"

수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만 예전에 이곳에서 서책을 구한 적이 있어, 다시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제 기억에는 그런 책을 드린 적도, 판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혹여 모르니 제 노스님께 여쭈어보겠습니다. 모처럼 오셨으니 경내를 둘러보셔도 좋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스님은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진우는 차를 마시며 기다리겠다며 자리에 남았다. 수는 홀로 방을 나와 정원을 둘러보기로 했다.


나카니와(中庭)의 푸른 이끼와 나무 그림자가 겹겹이 얽힌 정원은, 마치 시간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차르륵- 차르륵- 자갈 위로 곡선을 그리며 번져가는 소리, 동자승이 마당의 자갈을 정성스레 쓸고 있었다.

그 빗질 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를 이끄는 문을 열어 주는 듯했다. 이어 ’탁‘하고 떨어지는 시시오도시(鹿威し、ししおどし)의 울림이 겹쳐지자, 현실과 환상이 아슬하게 뒤섞였다. 순간, 동자승의 모습은 이끼와 그림자에 어우러져 정원의 일부가 된 듯했다.


수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동자승이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수가 가까이 다가가자, 동자승은 빗자루를 곁에 내려놓고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건넸다.


"왜 어렵게 보낸 서책을 다시 돌려보냈어."

얼떨결에 책을 받아든 수가 되물었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응!“

동자승은 해맑은 얼굴로 웃었다.

수는 책표지를 들여다보았다.

『황당한 야사(野史)』

놀란 수는 손가락으로 ’당‘과 ‘사(史)’자를 가려 보았다.

'... 당... 사... 그 책이잖아!'


"이 책... 어디서 난거예요? 이건 도대체 무슨 책이죠?“

"그대가 다시 보냈잖아. 이건... 그대가 찾던 기억이야.”

그 순간, 멀리서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 낭자, 스님 오셨어요! 어디 계시오-"

수는 동자승을 돌아보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하고,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미안하지만... 노스님께 여쭈어보아도 조선 서책에 대해서는 아시는 바가 없답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동자승에게 여쭙고 싶은 게 있어 그러는데, 잠시 방으로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스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동자승요?

이 절에는 노스님과 저, 단 두 사람뿐입니다. 설마 이곳에서 동자승을 보셨다는 겁니가...? 이런 해괴한 일이...”

수는 흠칫 놀라 도포 안을 더듬었다. 그 안에는... 분명 책이 있었다.

하룻밤 묵어갈 것이냐는 스님의 물음을 뒤로한 채, 수와 진우는 절을 내려왔다.




(연회)

밤늦도록 조선통신사를 환영하는 연회가 이어졌다.

교토의 연회장에서는 게이샤가 샤미센을 타며 노래를 불렀고, 처음에는 통신사단의 관료들도 점잖게 술잔을 기울이며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밤이 깊어지고 술이 돌자, 이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게이샤의 손을 잡고 조선 정가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일본의 노랫가락과 조선의 가락이 어지럽게 엉켜, 혼란스러운 음률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수는 그 소란을 뒤로한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연회장 옆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자, 후덥지근한 밤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연회가 시작된지 얼마지나지 않아 박영효와 진우, 그리고 몇몇 젊은이들이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갔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슴을 스쳐 지나갔지만, 수는 고개를 저으며 그 감정을 애써 털어내려 했다.

지금은 자신의 문제조차 감당하기 벅찬 때였다.


수는 행랑주머니에서 낮에 동자승에게 받은 책을 꺼내 펼쳤다. 조금 전에도 확인했듯, 책 속은 여전히 백지였다.

"대체 뭐가 기억이라는 거야...

하얀 종이뿐이잖아.“

수는 책장을 덮은 채 한참을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배는 검은 바닷길을 미끄러지듯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 여름 폭우도 없었고, 한 방울의 비도 없이 순풍을 받아 험하기로 소문난 시모노세키 해협을 벗어나고 있었다.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현해탄이란 말이지.”


수는 검은 바다를 응시한 채, 낮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

진우가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처음 듣는 정가입니다만... 참 구슬프고 아름답군요.“


수는 옅은 미소를 띠며 말을 돌렸다.

"요즘 많이 바쁘신 것 같습디다.“

”음... 절에서도 그렇고, 수 낭자가 마음이 많이 허한 것 같더군요.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오. 내가... 대의가 바빠서 그랬소.“


수는 바다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레 물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만나 보셨습니까?“

진우는 흠칫하며 수를 바라보았다.

”그걸... 어떻게...“

”후쿠자와 유키치와 함께 있던 분, 이토 히로부미 아니던가요?“

수의 목소리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긴장이 베어 있었고, 진우는 한순간 머뭇거리더니 눈길을 돌렸다.

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제가 아는 건 많지 않습니다. 다만... 메이지 유신을 이끈 이들은 대체로 큐슈나 시코쿠 출신의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후반의 젊은이들로, 열정은 넘치지만 정치 경험은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의 언변과 명분이 번듯해 보여도, 그 뒤에 감춰진 야망은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오쿠보 도시미치 같은 이는 개혁을 주도했으나, 결국 암살로 생을 마치지 않았습니까.“


수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근심이 스며 있었다.

”의원님이 어떤 신념을 가지셨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정치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엄청난 야심을 품은 ’욕망의 덩어리‘라는 것... 그것만은 전하고 싶었습니다.“

진우는 한참 동안 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생각보다 깊었으나, 설명하기 힘든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수 낭자의 마음은 알겠소. 허나 왜 이런 말을 내게 하는 것이오?“

수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하며 나직이 말했다.


”각자도생이라 하셨지만... 필요할 땐 서로 돕기로, 그렇게 약속했잖아요.“





※이야기는 <4화-그대, 정혼자입니까>로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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