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소포

by 릿다


(소포)

"이게 정말 그 먼 이국에서 온 거라구요? “

수가 우정국에서 받아온 상자를 바라보자, 삼월이는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요리조리 살폈다. 그녀의 손이 상자 위를 쓰다듬었다.

"아씨! 이 그림 같은 글자들 좀 보세요. 뭐라고 쓴 건지 얼른 좀 읽어주세요. 누가 보낸 거예요? 아씨는 어쩜 저 먼 나라에도 아는 분이 계시다니요?“


수는 봉인된 우표와 발신인의 이름을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읽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밀려왔다.

"현서 오라버니가 보낸 거야.“

그 말을 들은 삼월이는 펄쩍 뛰더니 마루 끝으로 가 털썩 주저앉았다.


"현서 도련님, 보기보다 참 뻔뻔하네... 그 여자랑 도망쳐서는 어디 거지꼴로 산다던가요? 이제 와서 아씨 보고 데리러 오래요?"

수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맨 위에 놓인 사진을 꺼내 삼월이에게 내밀자, 삼월이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투덜거렸다.


"아이고, 자랑질하려고 보냈네! 꼭꼭 숨어 살아도 모자랄 판에, 버리고 간 정혼녀한테 자식 자랑이라니... 저러다 천벌 받아요. 천벌!"

화를 억누르지 못한 삼월이는 수의 손에서 사진을 확 빼앗아 마루에 내던졌다. 놀란 수는 그녀를 밀치듯 떼어내고 황급히 사진을 주워들었다.

"삼월이, 너 왜 이래! 갑자기 왜 화를 내고 그래?"


삼월이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수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아씨는 분하지도 않아요? 억울하지도 않냐고요!

지금 한양 사람들은 아씨가 실성해서 파혼당했다고 수군거리며 비웃고 있다구요. 그런데도 그 파혼자가 야반도주해 낳은 자식 사진을 보고 웃고 계시다니...

진짜 실성하신 게 맞네, 맞아!"


분한 마음에 눈물을 글썽이는 삼월이를 바라보던 수는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 곁에 조용히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삼월아, 너도 언젠가 마음을 다해 연모하는 이를 만나면, 현서 오라버니의 마음을 알게 될 거야. 부모 형제 다 버리고, 먼 이국땅에 가서라도 함께하고 싶을 만큼 금이 언니를 사랑했던 거야.

오라버니는 용기 있는 사람이야. 거기서 드디어 새로운 가족이 생긴 거지. 그걸, 옛 정혼녀였던 나에게 축하받고 싶었던 거야. 그리고... 미안한 마음도 함께 담아서.”


삼월이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수를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씨가 이렇게 물러터지니까, 손에 쥔 것도 뺏기는 거라구요. 앞으론 야무지게 자기 것 좀 챙기세요. 옆에서 얼마나 속이 터지는지 아세요.”

수는 삼월이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주 잡은 손등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상자 겉면의 우표에는 ‘이탈리아’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안에는 손바느질로 정성껏 지은 남녀 한복 한 벌과, 돌을 갓 지난 듯한 아기를 품에 안은 현서와 금이의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다.

수는 이 사진을 진우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의원을 나온 그날 이후로 그를 본 적이 없어, 선뜻 나서지 못했다.


문득, 마포나루에서 현서와 금이를 함께 떠나보내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 아침 햇살 속에서 스치듯 닿았던 진우의 손끝의 감촉까지도...

수는 한복과 사진을 정갈히 접어 보자기를 곱게 싸 담았다. 보자기 귀퉁이에는 자두꽃 세 송이가 단정히 수 놓여 있었다.


본가로 돌아온 뒤 처음 찾는 의원이라, 수의 발걸음에는 조심스러움이 묻어났다. 살금살금 담장을 따라 돌아 대문에 가까워지자. 안쪽에서 낮은 말소리가 바람에 실려 새어 나왔다.





(진우의 선택)

진우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도 일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서역의 종교 지도자 그리스도는 로마인들에게 처형당했지만, 정작 그를 미워한 건 로마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고. 즉, 동포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고 했지.

우리가 일본과 서역의 문호를 열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백성을 계몽하자고 뜻을 모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상대는 거칠게 맞받았다.

”백성과 농민들은 무지하네. 우리 같은 지식인이 그들을 계몽하는 데 힘쓰면 되는 것이네.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정작 그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지.

그걸 아는 건 우리야.

우리가 일본의 정치와 정책을 배우고 그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가. 자네도 박영효와 함께 일본 정치가들을 만나 뜻을 나누지 않았는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진우의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나는 우선 백성들의 삶부터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네. 종두학교에서 하루빨리 종두법을 정착시켜, 무고하게 죽어가는 아이들부터 구하는 것이 먼저일세.“


진우의 말에 상대는 부드럽지만 설득하려는 어조로 응수했다.

”곧 일이 시작될 걸세.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김옥균 대감도 자네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하더군. 지석영 선생도 종두법에 관심이 많고, 개화사상에 뜻이 있다 하니... 이참에 뜻을 함께 모아 보세.“


잠시 뜸을 들이던 진우가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의원일세. 제중원과 종두학교에서 의술에 전념하고 싶네. 미안하네.“

그 말에 상대는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일전에 개화에 반대하는 이대 감 댁 여식과 일본에 다녀왔다고 하던데... 혹시 그 여식 때문인가?

그래서 이렇게 몸을 사리는 건가?“


진우는 숨을 멈춘 듯한 침묵 끝에, 단호히 잘라 말했다.

”그녀는 이일과 무관하네. 억측으로 무고한 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말게. 이건 철저히 내 결정일뿐일세. “

상대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듯 외쳤다.

”그동안 함께해 온 시간이 얼마인데, 이제 와서 의술을 핑계 삼아 빠지다니! 우리가 자네에게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크다는 걸 알게나. “


그 모든 말을 문밖에서 엿듣고 있던 수는, 진우가 외면당하는 듯한 대목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러나 해는 갑신년.


바람이 거세게 불 때는, 갈대처럼 휘어져 거친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지혜도 필요한 법.

수는 스스로를 그렇게 다독였다.


그 순간-

도포 자락을 거칠게 털며 한 사내가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화들짝 놀란 수는 몸을 돌려 담벼락에 바짝 붙었다.

사내는 그녀의 뒷모습을 힐끗 보았지만,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마음)

수는 조심스레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진우는 마당 한쪽에서 종이를 태우고 있었고, 수가 나타나자 손에 들고 있던 ‘김옥균’이라 적힌 종이를 그대로 불 속에 던졌다.

잠시 망설이며 서 있는 수를 향해, 진우가 먼저 말을 건넸다.


”얼굴이... 상했습니다. “

수는 그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의원님도... 많이 상하셨습니다."

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수는 두 손에 들고 온 보자기를 살며시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현서 오라버니가 보내온 거예요. 꼭, 의원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의원 마루에 나란히 앉아 보자기를 풀었다.

안에는 혼례 예복처럼 화려하게 수 놓인 남녀의 한복이 곱게 접혀 있었다. 순간, 수의 얼굴이 붉어졌다. 진우의 한복은 수의 것과 짝을 이룬 듯, 같은 계열의 옅은 분홍빛 비단으로 정성스럽게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참 곱네요... ‘곱다’는 말, 이럴 때 쓰는 말 같아요."

진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곁에 놓인 사진을 집어 들었다. 사진 뒷면에는 현서의 필체로 적힌 글이 있었다.

“'민수진'

그대들 이름에서 한 자씩 따 아이 이름을 지었다네. 예쁜 우리 공주님 꼭 보여주고 싶었네. 우리 가족의 은인인 그대들의 행복을, 멀리서나마 늘 기원하고 있다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사진을 바라보다가, 눈길이 마주치자 동시에 웃음을 터드렸다. 사진 속 아기는 아무리 봐도 씩씩한 사내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진우는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행복해 보입니다. “

수도 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지면 가족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부부는 소소한 말을 주고받으며 하루를 정리하고...

그리고 또 다른 내일을 함께 맞이하는 삶. 저도 가끔 그런 일상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했어요.”

진우는 한동안 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평범한 것일수록 손에 넣기 어렵지요. 저도... 그런 행복을 꿈꿨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그대가 파혼당하도록, 제가 도왔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대에게 흠이 생기면... 언감생심, 내게도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의 눈빛에는 고백보다 더 깊은 후회가 어려 있었다. 수는 조용히 손을 뻗어 진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세상이 변했다 해도... 나는 중인이고, 그대는 사대부 집 규수입니다. 이 신분의 벽은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바뀌지 않을 겁니다.”

수의 눈빛은 맑고 단호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러나 또렷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천지개벽-

제 가슴에서는... 벌써 일어났는걸요."

진우는 순간 숨을 멈춘 듯 수를 바라보다,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엔 말 대신 긴 정적이 흘렀고, 진우는 수의 얼굴을 조심스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추었다.





(의심의 시작)

다음 날, 이화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던 수는, 갑자기 쾅,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진이가 방 안으로 뛰어들며 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달이가... 달이가 하혈이 심해요! 의원님댁에 갔는데 안 계셨어요. 선생님, 의원님 어디 계신지 아세요?“

수는 깜짝 놀라 진이를 바라보다가, 곧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님은 제중원에 계실 거야. 진이는 어서 그리로 달려가. 나는 예월관으로 가볼게.“


진이는 지체할 틈도 없이 제중원을 향해 달려나갔고, 수는 숨이 가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예월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예월관에 도착해 달이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코끝을 찌르는 진한 피비린내가 방 안 가득 차올랐다.


”언제부터 하혈을 했니?“

수의 물음에 래이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어제부터요... 달이는 지금 의식도 없는 것 같아요. 너무 무서워요.“

수는 흐느끼는 래이를 진정시키며 이불을 들춰 보았다. 침구는 피에 흠뻑 젖어 있었고, 달이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자, 살결은 뜨겁다가도 금세 식어 내려가는 듯했다. 달이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달이야...“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진우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약재를 먹인 거지?“

진우의 물음에, 래이가 겁에 질린 얼굴로 약재 봉지를 내밀었다. 진우는 그것을 받아 펼쳐 들고는, 한 줌씩 집어 들며 하나하나 살폈다.


”이런 독한 약을... 대체 누구 짓이냐. 사람한테 이런 걸 먹이다니...“

이를 악무는 그의 턱선이 움찔거렸다. 곧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하혈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제중원으로 옮겨야 한다. 당장 준비해!“

진우는 혼절하듯 축 늘어진 달이를 조심스럽게 등에 업고, 곧장 방을 나섰다.




제중원 병실.

수는 불안한 마음으로 병실 안을 서성이며, 수술실에서 돌아올 달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 진우가 수술 침대를 밀며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진이와 래이가 달이의 이불과 옷가지가 담은 보따리를 안고 들어왔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하지만...“

진우는 말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자궁 내막이 너무 심하게 손상돼서... 결국 아기집을 절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달이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을 겁니다.“


무거운 얼굴로 말을 마친 진우는 지친 몸으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마른세수를 하고는, 이내 다시 몸을 일으키며 덧붙였다.

”정리할 게 좀 있어...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진우가 병실 문을 나서자, 진이는 달이의 창백한 얼굴을 물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주며 울먹였다.

”불쌍한 달이... 어쩌면 좋아. 정말 어쩌면 좋아...“

래이는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훔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벌컥- 병실 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열린 문틈 사이로 겨울 찬바람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병실 안을 휩쓸고 지나가자, 몸이 움츠러들고 마음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수는 얼른 일어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설주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작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는 <8화- 진통>으로 이어집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