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새벽빛이 스며드는 방문을 열고 삼월이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었다.
"무슨 큰일이 난 것 같아요. 어서 나가보셔야겠어요.“
수는 자던 옷 위에 덧저고리만 대충 걸치고, 대문간으로 달려나갔다.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던 억쇠 어멈은 수를 보자마자 울먹이며 매달리듯 말했다.
"의원님이... 의금부에 끌려갔어요. 포졸들이 새벽부터 들이닥쳐, 자고 계시던 분을 막무가내로 끌어내 갔구먼요. 아씨, 어쩌면 좋아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씨! 이러시면 안 돼요. 안에 들어가 사람을 불러올게요."
삼월이가 안으로 뛰어들려 하자, 수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니야... 새언니가 알면 안 되니까, 조용히 해. "
수는 삼월이의 손을 꼭 붙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억쇠 어멈을 향해 말했다.
"너무 상심 마세요. 일단 집으로 돌아가 계세요. 제가 알아보고 의원으로 가 볼게요.“
억쇠 어멈은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불안한 얼굴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골목 어귀를 빠져나갔다.
그는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우정국 김옥균과도 가까운 사이로 알려져 있었고, 얼마 전 제중원에 치료를 받으러 왔을 때는 진우의 소개로 수와 인사를 나눈 적도 있었다.
공사관은 민중들이 들이닥친 흔적으로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지고 문짝마저 너덜너덜해 있었다.
수는 그 어수선한 현장을 급히 지나쳐 공사관실에 들어섰다. 후쿠자와와 마주한 순간, 그녀는 숨을 고를 틈조차 없이 간절한 말을 쏟아냈다.
"진우 의원님이 갑신정변에 가담한 분이 아님을, 공사관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부디 그분과의 인연을 생각하시어 이 사실을 조선 정부에 알려주십시오. 게다가 공사관님께서도 그날 낙성식 연회에 직접 참석하셨으니, 조선 관리들 또한 공사관님의 말씀을 믿을 것입니다.”
후쿠자와는 답답하다는 듯 수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낙성식 연회에서 수청을 들었던 예월관 기녀, 래이. 그 여자가 진우 상을 보았다며 고변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정변에 가담한 자들의 수결이 박영효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 진우 상의 수결도 있었다 합니다.“
’래이...?‘
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수는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그녀는 가까운 벽에 몸을 기댔다.
"결국 그날 연회에 있던 기녀들이 왕비 쪽과 내통해 일을 그르쳤단 말입니다. 모든 걸 망쳐놓았어요!“
후쿠자와는 전날 민중의 습격으로 엉망이 된 집기를 정리하다 말고, 차가운 눈빛으로 수를 노려보았다.
"진우 상이 정변에 가담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증언이 있고 수결이 있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소.
게다가 종두 학교에서 진행된 종두법 연구는 우리 일본도 큰 관심을 가지고 지원한 사업이었는데, 감사는커녕 이 지경이 되었으니... 보시오. 조선 민중들은 선진 문물을 전하려는 우리 일본을 적으로 여기고 있소!”
말을 잇지 못한 그는 울분을 이기지 못한 듯 쓰러져 있던 의자를 거칠게 발로 걷어찼다. 이어 분노에 북받친 목소리로 공사관 직원들을 불러댔다.
수는 격한 숨을 내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벽을 짚지 않으면 몸이 휘청거릴 만큼 충격이 컸다.
'수결?'
그 순간, 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진우가 약봉지를 열었던 그날이었다. 달이가 하혈하던 날, 진우는 약제를 확인하려 약봉지를 들춰보았고, 그녀를 일으켜 업으려다 바닥을 짚는 순간- 무심코 봉지 위에 손을 누르고 말았던 장면이 섬광처럼 스쳐 갔다.
포졸에게 예조에 계신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 간청한 뒤, 그녀는 의금부 마당을 초조하게 서성이며 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아버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 새언니가 보낸 것이냐? 아무리 그래도 이 험한 곳에 아녀자가 오다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아버지, 정변에 가담한 자들의 수결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확인하고 싶어요. 제발... 볼 수 있게 해주세요.“
아버지는 단호한 어조로 말을 잘랐다.
"안된다. 어서 돌아가거라. 그들은 대역 죄인들이다!"
"부탁이에요... 수결만, 수결만 확인하고 갈게요...“
수는 눈물을 쏟으며 애원했다.
아버지는 한참 동안 수를 바라보다가, 안쓰러운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지나가던 별기군을 불러 세웠다.
"이 아이는 내 여식이다.
이번 반란군들의 증거물 보관 창고로 데려가라. 그리고... 주변이 어수선하니, 일이 끝나면 이 아이를 집까지 바래다주도록 하라.”
말을 마친 아버지는 수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대궐 쪽을 향해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진우의 수결 문서라 불린 것은-
달이를 업던 날, 그가 일어서려 바닥을 짚으며 무심코 눌렀던 약봉지였다. 흰 종이에 남은 피 묻은 손자국, 그 위로 누군가 몇 자를 덧써 놓았을 뿐이었다.
래이가 챙겨 간 바로 그 약봉지였다.
그 종이를 움켜쥔 수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수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의금부를 나섰다.
옥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에 가슴이 찢어질 듯 저며왔다. 혹시, 그 비명이 진우의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두 다리는 자꾸만 휘청거렸다.
갑신정변의 삼일천하가 막을 내린 바로 그 하루.
도성의 공기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왜... 의원님과 내가 래이에게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어찌 이런 배신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망과 분노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 채, 수는 예월관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수는 곁길로 돌아 별관 뒤편의 쪽문으로 다가갔다. 문틈 사이로 격한 다툼의 소리가 새어 나왔다.
"손님방에서 들은 이야기를 절대 밖으로 흘려선 안 된다는 걸 몰라?”
진이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이어지는 달이의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뒤따랐다.
“진정해. 언니...”
그러나 진이는 멈추지 않았다.
"이번 일로 예월관이 문을 닫게 될지도 몰라!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일을 키운 거야? 너답지 않게, 왜 이런 일에 끼어드는 거야!“
그 격앙된 외침 사이로, 래이의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다운 게 뭔데? 겁 많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뭐든 시키면 웃으며 '네' 하는 게 나다운 거야?"
래이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러냐고?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친들, 결국은 웃음 팔고 몸 파는 기생일 뿐이야. 농민운동이니, 개화사상이니- 입으로만 개혁을 떠드는 양반들, 그 얼치기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아?”
래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
“예월관에 들락거리는 김영래.
그 벼슬아치 자금이 어디서 나왔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진이 언니는 정말 그 양반들이 우리 같은 천민들의 삶을 안다고 생각해? 그래서 예월관 아이들 돈을 긁어모아 그들에게 갖다 바친 거야?“
‘짝!’
진이의 떨리는 손이 허공을 가르며 래이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래이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꼿꼿이 들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의원님이 약을 지어주지 않자... 달이 언니, 아이가 들어섰잖아. 그걸 숨긴 채 끙끙 앓던 거- 언니도 다 알고 있었잖아.
겁에 질려 의원님께도, 누구에게도 말도 못 하고 헛구역질만 하다가... 결국 김영래에게 들켰고,
그자가 준 약을 먹은 뒤, 하혈이 시작됐지.
죽을 뻔했어, 언니. 그게 정말 사람에게 먹일 약이었냐고!
말해 봐. 달이 언니도 의원님께 들었잖아.
이제... 영원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래이의 목소리에 서서히 눈물이 스며들자, 달이가 조용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잠시 후, 진이가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는 들어서려던 쪽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래이에 대한 원망, 그들의 상처를 외면했던 자책감, 그리고 자신의 오지랖이 달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밀려와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알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던 진실이었다.
자괴감에 짓눌린 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숙여졌다.
수의 어머니는 조실부모한 데다 남매밖에 없는 집안에서 자라, 옥사에 갇힌 오라비를 둔 며느리의 심정을 모를리 없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죽을 끓여 며느리 방으로 들어갔다.
”아가, 네 마음은 다 알겠다만... 그래도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니. 이러다 너 먼저 쓰러지겠다.“
새언니는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아 시어머니 품에 안기더니,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수원 관사에 내려가 있던 오라비가 급히 한양으로 올라왔다.
그는 눈이 퉁퉁 부은 아내를 바라보며, 말보다 먼저 안타까움이 치밀어 올랐다. 아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눈물을 흘린 뒤, 그녀를 위로하고자 수를 데리고 의금부로 향했다.
옥사는 한겨울 바람이 스며들어 살을 에듯 차가웠다.
며칠 사이 거듭된 조사 탓인지, 진우의 얼굴은 수척했고 기력마저 잃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맞았다.
수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가져온 소쿠리 보자기를 풀어 진우 앞에 놓았다.
"어서 드셔 보세요. 날이 추워 속이 많이 허하실 거예요."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저를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라비는 깊은 한숨을 내쉰 뒤, 다리를 탈탈 떨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제가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일에 가담하신 겁니까?"
그 말에 수가 오라비를 흘겨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가담한 게 아니에요. 누명을 쓴 거예요. 수결은 조작된 거니까, 오라버니가 꼭 밝혀 주셔야 해요.“
수의 말에,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이 뇌리를 스쳤다.
'진우는 이제 손쓸 수 없다.
대궐에서는 이참에 일본에게 까지 책임을 묻겠다 벼르고 있으니, 이러다 우리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이번 일에 철저히 발을 빼고, 남처럼 굴어야 한다. 네 집사람 단속도 잘해야 할 게다...”
오라비는 불안한 듯, 이번에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그게... 쉽지가 않은 것 같아. 아버지 말씀으론, 형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걸 봤다는 이들이 제법 있다고 하더라구.“
그 말에 듣는 순간,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그는 수를 바라보더니 낮게 물었다.
"달이는... 좀 어떻습니까?“
이 와중에도 아이들을 먼저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수는 안쓰러운 눈길로 답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왔어요. 전... 저는 그 아이들이 정말...“
끝내 말을 잊지 못한 채, 꾹 눌러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진우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라비는 머쓱한 듯 조용히 몸을 돌려 옥사를 빠져나갔다.
진우는 낮게 속삭였다.
"나라고 원망스럽지 않겠소. 그러나 이건 인과율이요. 세심히 살피지 못한 내 허물이 크오.
다만... 남겨질 그대에게 미안할 뿐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낙담하지 마시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대가 바라는 행복, 내가 꼭 이루어 주리다.“
진우는 눈물로 얼룩진 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손을 살며시 잡아 올리더니, 맹세의 인장을 찍듯 조심스레 그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