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자두 꽃잎처럼 흩날리던 눈송이들은 어느새 나뭇가지와 장독대 위에 소복이 쌓여, 마당을 온통 하얗게 물들였다.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 소리를 내며 래이가 천천히 이화당 안으로 들어섰다.
마루에 앉아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던 수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눈길이 마주친 순간, 래이의 걸음이 잠시 멎었다.
그녀는 잠시 서서 숨을 고르더니, 주저하는 듯 발걸음을 옮겨와 수 곁에 나란히 앉았다.
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래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는 시선을 눈 쌓인 마당으로 돌렸다. 고요히 내려앉는 눈송이를 한동안 지켜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조선에서 요릿집을 열겠다더니, 왜 굳이 청으로 가겠다고 하는 거냐?”
레이는 대답 대신 눈 내리는 마당만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저한테 화를 내지 않으세요? 밉고... 원망스러우실 텐데요.“
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씁쓸함과 자조가 묻어 있었다.
"...나도 의원님을 많이 좋아하거든.
언제 어디서든 내가 의원님을 바라볼 때, 너 역시 같은 눈빛으로 그분을 보고 있었지. 흠모하는 이를 향한 그 간절한 마음, 애타는 눈빛이...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더구나.”
그 말을 들은 레이는 수를 향해 원망 어린 눈빛을 던졌다.
"전... 선생님의 그 당당함이 싫습니다. 그 여유로운 말투, 낙천적인 태도...
저 같은 천한 몸으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닿을 수 없는 것들이, 선생님께는 너무도 당연하지요.“
목소리는 떨렸고, 눈물은 이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선생님은 태어날 때부터 귀한 신분, 양반가 아씨라는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사랑받고, 위험에서도 지켜지고,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시지요.
저희 같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살아가는지 알지도 못하시면서, 도리니 뭐니 장황하게 내뱉으신 그 한마디 때문에... 의원님은 결국 우리에게 주시던 약까지 끊으셨어요.”
그 말은 수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꾹 눌러 담아두었던 비통함이 흔들리며 번져갔다. 래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떨려, 마침내 터져 나올 듯 흔들렸다.
“의원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같은 천한 사람도 신분을 넘어 새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함께 그 길을 가자고요.
그분은 제게...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의원님을 비겁자로 만드셨어요. 겁쟁이로요. 모든 것을 가진 선생님이... 끝내 다 망쳐 버린 거예요.”
래이의 뒤틀린 원망과 질투가 진우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으나, 수는 끝내 눈물에 젖은 그녀의 얼굴 앞에 내뱉지 못했다.
그저 소매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삼켜 버린 원망을 눌러 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앞으로 마주할 세상은... 신분 때문에 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될 거야,“
하지만 래이는 그 손수건을 받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자리에서 일어나,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이화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눈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앞이 흐려져 발걸음은 자꾸 휘청거렸다.
얼마 가지 못해, 래이는 질퍽한 흙바닥에 힘없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떨리는 어깨는 멈추지 않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끝내 치밀어 오른 울음소리까지는 막지 못했다.
주모자 김옥균의 가족은 연좌제로 모두 음독자살을 택했고, 박영효의 아버지는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내 그의 처자식에게도 음독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날은 갑신정변 관련자들과 진우가 일본으로 추방되기 전날이었다. 수는 몰래 인천 제물포항을 찾았다.
죄인들을 호송하는 행렬 속에는 궁녀와 무수리들이 동원되었는데, 진이와 달이는 그들로 위장해 숨어들었다.
늦은 밤, 인천 옥사. 진이는 관수에게 엽전을 쥐여주고, 잠시 진우를 옥사 밖으로 불러낼 수 있었다.
진우는 모진 고문을 당했는지 상투가 풀려 산발이 된 채, 다리를 절며 걸어 나왔다.
그 처참한 모습을 보는 순간, 수의 가슴은 찢어지듯 저며왔고, 목이 메어 숨조차 막혔다.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내디딘 수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간신히 속삭였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끝내 아무 힘도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진우는 놀란 눈으로 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희미한 미소 지었다.
"신이 제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셨나 봅니다. 그대를... 이 눈에 담고 가게 해 주시니 말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는 달려가 진우를 껴안았다.
"그냥 모른 척했어야 했는데... 의원님은 의술에만 마음을 두셨는데, 제가 너무 넘겨짚었어요..."
진우는 "아니요, 아니오..."를 되뇌며 수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때, 어둠을 가르며 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상궁 마마! 이 무수리는 저희가 심부름을 시킨 아이일 뿐입니다.”
상궁은 눈을 부릅뜨며 호통쳤다.
"저 아이는 궁에서 온 무수리가 아니다! 내가 친히 무수리를 추려왔는데, 얼굴을 모르겠느냐?
그리고 저 죄인은 누구냐? 옥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냐?"
상궁의 외침에 궁녀들이 놀라 허둥지둥 뒤로 물러섰고, 그 소란을 듣고 순찰 중이던 별기군이 급히 몰려들었다.
수와 진우는 눈빛을 주고받더니 그대로 바닷가 쪽으로 달려갔다. 달리던 중, 숨이 가빠온 수가 진우를 향해 외쳤다.
”일본... 아라시야마 고서적을 찾으러 갔던 그 절 기억하시지요! 그 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살아만 계셔요... 제발, 꼭 살아 계셔야 합니다!“
그 순간, 뒤편에서 별기군과 일본 군졸들이 고함을 치며 달려들었다.
”멈추어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탕! 탕!“
총성이 울리는 순간, 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넘어지며 마지막으로 본 것은, 몸부림치며 별기군과 일본 군졸들에게 끌려가는 진우의 모습이었다.
수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입술만 달싹이며 진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목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음 편이 드디어 마지막 편입니다.
함께해 주셨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