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rew Jul 17. 2022

晩書 홍 윤 기_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매스컴에선 유래 없는 찜통더위라고 늙은이들은 특히 조심하라고 경계경보가 내려졌다. 이 정도 더위쯤이야 하고 코웃음을 쳐 보지만 그건 내 생각이고 불안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긴 하다. 더위는 그렇다고 해도 다시 급속하게 확산되는 코로나는 천하의 귀신 잡던 노 해병(老 海兵)에게도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젊음이 부르던 그 때의 그 열정은 식었지만 좀이 쑤시는 걸 달래기가 쉽지 않다. 가까운 물가에 발 담그고 견지낚시라도 다녀와야지 이 황금 같은 주말을 어쩌란 말인가? 지난해 여름 낚시를 준비만 해 놓고 물가에 가지 못했던 그 낚시도구를 꺼내 손질을 하는데, 할멈이 입을 삐죽이면서 한마디 한다. “영감이 아직도 ‘海兵’인줄 알아요? 고기가 해병 잡겠네.” 한다. 이런 이 무슨 할멈의 망언이냐고 나무라면서 ‘이봐 한번 해병은 영원(永遠) 하다는 걸 몰라?’하는데 아들 녀석이 들어온다. “어디 가시게요?”“그래 날씨도 후덥지근하고 갑갑해서 가까운 개울에 나가 견지 좀 하고 와야겠다.” “다음에 제가 모시고 나갈 테니 오늘은 참으시죠.”결론은 나가지 말라는 것으로 모아진다. ‘에이 십년만 젊었어도,,,,,,.’투덜거리며 못이기는 척 슬그머니 낚시도구를 챙겨 제자리에 갔다두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무력해 졌을까? 이래서는 안 되는데 자리를 차고 일어나 옥상엘 올라가 보니 포기한 것이 다행이다 싶다. 젊은 그 옛날 그 전장에서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는데 아주 잠시 옥상에 있었을 뿐인데 등줄기를 타고, 빗물처럼 흐르는 땀줄기라니 괘씸한 세월이 날 그렇게 만들어 놨겠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터, 순리를 역행하지 말고 순응하며 살아가라는 준엄한 하늘의 섭리인 듯하다. 모처럼 들떴던 마음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아 PC를 열었다. 도무지 자판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주방에서 아내는 딸애 가져다준다고 굵은 땀을 닦아 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뭔가 만들고 있다. 주말인데, 허긴 매일이 주말이면서 새삼 왜 그렇게 주말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는지, 그래 ‘初伏’이잖아. “뽐아 너 오늘 조심해라”거실에 엎드려 늘어지게 자고 있던 뽐이가 깜짝 놀라 쳐다본다. 뽐이는 이제 세 살 먹은 우리 집 강아지 식구다.“에이 싱겁긴,,,,,,.”주말인데, 그래 주말인데 뭘 어쩌라고,,,,,,.심심하고, 맨송맨송하다. 내 뜻과는 관계없이 세월이 훔쳐간 내 젊음은 지금 어디 있을까? 허 참 


 이렇게 아름다운 날에 방콕이라니,,,,,,.TV를 켰다. 잃어버린 젊음들이 TV안에 모여 있었다. 구리 빛 몸매에 늘씬한 팔등신 미녀들이 거기 있었고, 미녀들, 뿐이랴 내가 잃었던 모든 것들을 거기모인 세기의 젊은 건각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계의 선남선녀들이 모두 내 집 거실에 모여 있었다. 분명 꿈은 아니다.‘2022 오리건 세계 육상 선수권대회’화면엔 여자 1500m 예선에 출전한 선수들이 트랙(track) 출발선에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트랙(track) 위에 서있는 여자들이다. ‘트랙(track)을 직역하면 사람들이 걸어 다녀서 생긴 길’이라고 했으니 문자 그대로 길 위의 여인이다. 지금 저 길 위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세기의 미녀 선수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출발과 동시에 5분이 채 안돼서, 정확하게 4분 30초 남짓이 지나면 승자가 가려지고, 승자와 패자의 환희와 아쉬움이 교차되는 순간이 온다. 트랙(track) 경기엔 1500m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종목 중에 트랙을 달리는 경기는 자기의 선(line)안으로만 달려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그러니까 자신만이 달려가야 하는‘길’을 지켜야 한다는 약속이다. 그 짧은 시간을 달려야 하는 선수들이 그 승리의 순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했을까? 선수들은 그 훈련자체가 삶의 길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삶은 연습이나 훈련이 없다. 리어설이 없는 연극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의 여정은 리허설 없이 모태에서 떨어지면서 고고의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신호로 삶의 달리기는 시작된다. 죽음이란 결승점을 향해 쉬지 않고 달리는 삶의 여정과 함께하는 ‘길’, 우리는 싫어도 어쩔 수 없는 길 위의 인생이다. 훈련을 하기위해서는 각종 도구가 필요하지만 실전에선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살아가는 동안에 그 삶을 위한 물질이 풍요롭기를 바라지만 막상 결승점에 도달 했을 때는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결승점은 차별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살아온 희비의 쌍곡선으로 남아 살아있는 자(者)의 기억 속에 추억될 것이다. 삶의 달리기에도 이른바 스타트(start)가 중요하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꼭 그렇게 순서대로 공평하게 순리대로 흘러가던가? 만인에게 공평하지 못한 삶의 길은 각자의 길이 모두 다르다. 비록 결승점은 오직 한 곳뿐이지만 그곳까지 달려가는 길은 가지가지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나의 길은 멀리 돌고 돌아 반세기 쯤 늦게 출발하는 난 코스였다. 10분 20분 정도 늦으면 지각이라고 한다지만 늦어도 너무 늦으면 기록에도 남지 않는다.


 포기하고 내 길의 끝으로 갈 수 있는 길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지막 결승선인 심판대에 섰을 때, 과연 내 삶의 가치는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인가? 전상병 시인은 그의 작품‘귀천’에서 이 세상에 소풍을 다녀간다고 했다지만, 난 이 세상에서 멋진 달리기 경기를 마치고 아름다운 꼴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찾아냈다. 너무 늦어서 지각생이 아닌 만학 생으로 내 삶의 휘니시 라인을 통과 하려는 것 이다. 삶의 달리기는 마라톤이다. 주저앉고 싶은 유혹이 왜 없었겠는가? 규정을 무시하고 보다 쉬운 길로 가고 싶은 악마의 속삭임도 그저 바보처럼 웃고 마음으로 소리 없이 울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울음엔 눈물이 없고, 아버지의 울음엔 소리가 없다. 내 삶의 길이 무너졌을 때는 이미 애비였고, 내가 가야 하는 길은 사나이의 길이였고, 내가 안간힘을 쓰며 가야했던 내 삶의 길은 나 혼자를 위한 길이 이미 아니었다. 내가 내 길 만큼이나 소중한, 그래서 지켜야 할 것들이 함께 있었다. 이제 하루하루 내 삶의 마지막 경기를 위한 결승점이 가까워 오지만 이제는 후회와 미련이 없다. 비록 위대한 삶의 길로 장식하지는 못했지만, 비록 순서대로 가지 못하고 역주행 했지만 난 그것을 더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잘도 여기까지 달려 왔다. 이제 남은 길은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겠나.

매거진의 이전글 애비라는 이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