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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Oct 11. 2023

이명과 비명



이명과 비명





도돌이표




_ 저는 꿈을 많이 꾸는데 늘 같은 장면이 나와요. 여섯 살 때부터 살았던 그 집에서 는 매일 도망쳐요. 그러다가 부모님이 걱정돼서 다시 되돌아가요. 그토록 도망치고 싶었던 그 집으로요. 그렇게 계속 돌아가다 보면 그 집은 결국 폭발해요. 내 몸은 하얗게 다 타버려요. 그러다가 나는 영영 사라지고 말아요.


_ 이제 그 집을 놓아주어야 해요. 꿈에서 그 집을 만나면 작별을 고하고 당당히 뒤돌아서 걸어가세요. 절대로 도망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단단히 다짐하고 잠들어도 꿈은 언제나 내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아무리 작별을 고해도 나는 또 그 집 앞에 서있다. 나는 매일 그 집에 화형식을 한다. 끝나지 않을 슬픔을 끝나지 않을 우울을 하얗게 태워버린다. 불행은 도돌이표처럼 내 삶을 맴돌고 있다. 끝나지 않는 연주. 1절 후에 2절, 3절, 4절, 아니 100절이 되어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대장정의 서사시 같다. 마치 '영심이'의 숫자송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명과 비명




 그 집은 아주 좁았다. 또 춥고 더웠으며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아버지는 매일 티브이를 골목 밖에서도 무슨 프로그램을 보는지 다 알정도로 크게 틀어 놓았다. 검정 비닐봉지를 들지 못할 만큼 체면이 중요한 아버지는 어떤 게 중요한 체면인지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티브이를 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는 한시도 티브이 소리가 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티브이는 삶의 낙이자 가리고 싶은 상처였다. 아버지는 귓병을 앓은 후 이명이 들리면서 이전보다 더 신경질적이 되었고, 이명을 가릴 더 큰소리가 필요했다. 아주 좁은 그 집에서 티브이는 내 방 입구에 있었고, 청각이 예민한 나는 아버지를 향해 자주 발작을 일으켰다.



 어느 날엔가 아버지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 버지가 예전에 집어던지고선 거금을 들여서 새로 산 전축 자랑에 심취해 있었다. 그 좁아터진 집구석에서 아버지처럼 눈치가 없던 아버지의 친구는 밤 열두 시가 넘도록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정말 이렇게 크게 전축을 틀어놓으면 전축이 폭발하든, 우리 집구석이 폭발하든, 아님 옆집 아저씨가 폭발하든 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태였다. 하지만 가장 먼저 폭발한 건 나였다. 멋들어지게 클래식을 듣던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는 전축의 선을 빼버리고 시끄럽다고 소리치는 나 어이없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아저씨! 이제 그만 집에 가세요!" 술이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울그락불그락했고 아버지 친구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아버지의 친구가 집으로 돌아간 후, 아버지는 이번엔 전축을 내게 집어던졌다. 엄마는 망가진 전축을 고이 장에 넣어두었고 그 이후로 전축을 고치지도 새로 사지도 않았다. 다행히 이후에 우리 집에서 전축이 틀어지는 날은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에게 아주 건방진 아이로 낙인찍혔다. 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건방지다며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 리집에서 전축이 영영 사망한 뒤, 아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티브이에 점점 더 집착했다. 시험 전날엔 티브이를 꺼달라는 부탁에 공부를 안 하면 되겠다고 비아냥거리더니, 시간이 많이 흘러 유산을 하고 산후조리중일 때에도 여기는 내 집이니 내 맘대로 티브이를 볼 거라며 내 속을 긁어댔다. 아버지의 집에서 내가 숨을 곳은 없었다.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진 것처럼 내 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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