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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연 Nov 02. 2023

비극에 비극을 더하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비극에 비극을 더하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비극에 비극을 더하면




_ 사람들을 믿지 못해요. 사람들의 말이 다 거짓말 같아요. 를 속이는 것 같고요. 어느 날 이혼하고 집을 나갔던 엄마가 거짓말처럼 집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처음에는 엄마를 보며 아버지처럼 헤실헤실 웃었는데, 나중에 알게 됐어요. 엄마가 돌아온 이유를요. 엄마가 큰 병에 걸렸더라고요.



 드라마에서 늘 엄마를 버리고 나갔던 아버지들은 큰 병이 걸리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도 그랬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온 엄마를 보며 기뻤던 것도 잠시였고, 엄마가 큰 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서 나는 아주 못된 딸이 되기로 했다. 더 이상 나를 포장하지 않으리라. 잘 사는 모습이 아니라 더 나락으로 떨어져 망가지리라. 엄마는 많이 아팠고, 나는 아픈 엄마를 괴롭히는 망나니 딸이 되었다. 내 삶은 불행이나 좌절이 익숙한 거였다. 그러니 엄마의 삶도 조금은 내 삶에 익숙해지길 바랐다. 내가 아주 쁜 사람임을 엄마에게 증명하려 애썼다. 지만 그건 내가 아니었고, 나는 우울해졌다.



 살면서 나를 증명해 보일 일이 있다면 그건 내 본연의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가치에 그들이 바라볼 나의 모습을 증명하려 애쓴다. 각종 미사여구를 붙여 나 자신보다 조금 더 그럴듯한 나를 만들어낸다. 숨기고 싶은 건 최대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미뤄 놓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모습의 나를 잘 보이는 데 꺼내 놓는다. 그건 거짓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본연의 나도 아니다.



 딱 봐도 길고양이 같은 아이가 집고양이이고, 딱 봐도 애완강아지 같은 아이가 들개라면, 그들이 고양이인 것과 강아지인 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과 자신의 환경을 설명해야 한다. 사람들은 내 겉모습에서 가정불화나 우울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엄마도 나의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엄마에게 지난 시간은 이미 파도 위 모래성처럼 부서졌고 내 시간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잊히길 바랐을 거다. 나는 제법 내 겉모습을 잘 꾸며 놓았. 엄마가 착각하고도 남을 만큼. 어떤 때에는 너 같은 애가 절망에 대해 뭘 알겠냐는 말을 들으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내 안의 절망은 온전히 내 것이었고, 내 비극은 점점 더 비극적이 되었다. 언젠가 그들이 내 비극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들분명 카타르시스를 느낄 거다. 








우울의 프레임




 사춘기에 걸리려면 적어도 자신을 돌볼 여력이 있어야 한다. 친구들이 사춘기에 걸려 반항을 할 때 나는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다. 언니와 나는 사춘기 같은 건 모르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건 우리에게 사치였다. 전쟁통에 사춘기에 걸려 부모에게 반항하는 아이는 없을 테니까. 사춘기는 안정된 가정의 아이들이 걸리는 거다. 불행, 가난이 아이를 성숙하게 하고, 그들에게 착한 아이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사춘기가 없던 아이들은 절대 그 프레임 밖으로 나설 수 없다. 그 프레임 안에는 아이를 옥죄는 우울이 한가득 들어있다. 다행히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어떤 아이는 그것들과 싸워내느라 아주 분주하게 자신을 괴롭힐 거다.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선물한 항아리(판도라의 상자) 안에는 절망, 불행, 좌절, 병, 우울, 슬픔, 의심, 시기, 질투 같은 온갖 재앙이 있었다. 그 항아리를 열어본 판도라는 항아리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불행에 놀라서 뚜껑을 재빨리 닫았고, 끝내 항아리 안에 남은 유일한 희망은 꺼내지 못했다. 판도라가 그 항아리를 받은 것은 판도라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판도라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싸움으로 인해 희생당한 가여운 여인일 뿐이다. 하지만, 그 가여운 여인은 유일한 희망을 꺼내지 못한 죄로 끝내 비난을 받으며 살아갔다. 내게 온 불행과 우울을 보느라 나는 그 항아리 안에 있는 희망을 끝내 발견해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우연히 쥐어준 절망들에서 벗어나지도 못할 거다.



 내내 살인 사건을 몰고 다니는 명탐정 코난처럼, 나는 내내 우울을 몰고 다녔다. 코난이 있는 곳에서 늘 살인이 일어나는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우울이 놓여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생긴 습관처럼 익숙하기도 했다. 어쩌면 희망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프레임은 아주 견고하고 튼튼했으니. 하지만 비극에 비극을 더하면 결국 물러설 곳이 없는 그곳에서 카타르시스가 생겨날 거다. 그러면 우울의 프레임을 부숴버리고, 판도라의 항아리를 부숴버려야지. 조금 더 용기 내어 희망이 나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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