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
아이를 등하원 시키다 보면 서로 아이의 부모들과 안면을 트게 된다.
그러다 어린이집 하원 후 놀이터에서 말을 주고 받다 보면 이 같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4시에 엄마가 직접 하원시킬 수 있다는 건 그 부모가
일반적인 직장을 다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을 하고 있는 건 맞으니까 당당하게 "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 경우는 손에 꼽는다.
적어도 1년 중에 반 이상이 계약으로 채워져 있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네"라고 답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자리 잡은 일러스트 작가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일이 없을 땐 몇 달 동안 문의조차 없다는 것이다.
내가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면 계약이 확정되어 일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을 테고,
난감한 어투로 그렇다고 답했다면 집에서 개인 작업만 하고 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프리랜서는 일이 불규칙하다는 것이 단점이지만 움직이는 만큼 돈을 버는 것은 장점이다.
그렇기에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직장 다니는 사람처럼 매일
고정 시간을 그림과 관련된 일에 투자하는 게 맞다. 그렇지 않으면 용돈벌이 밖에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일적으로 자리 잡기 위해 시간을 내보고 싶지만 아이 등하원, 학원 픽업, 집안일, 요리, 가족 관련
잡일 처리 등등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강제 휴무되는 나의 업무 시간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쓸하다.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 생각하는데 몇 달 동안 문의조차 오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하기 그지없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취미인지 일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때쯤이면 별의별 이유가 생각나면서
자존감은 내려가고 이제 그만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달 정도 일이 없을 때 위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역시나 나는 “집에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면서도 마음이 참 찝찝했다.
그날 밤, 답답한 마음에 남편에게 그때의 상황과 나의 기분을 털어놓았다.
“일이 없는데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니까 거짓말한 것처럼 기분이 찝찝하더라고.”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 나는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지금도 애 보느라 시간도 많이 못 쓰는데 이 정도 하는 것도 잘하고 있는 거지.
일을 하고 있는 데 왜 안 하고 있다 생각해? 내가 볼 땐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 것 같아.
그림이란 게 쓰이는 곳이 많아서 활용하기 좋은데 너무 당장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봐야지.
그 대화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생각해 보게 했다.
충분히 집안일과 육아를 하고 있음에도 직접적으로 돈을 버는 행위가 아닐 경우 스스로를
<집에서 노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동안 무리해서라도 작업 시간을 늘려서 얻은 많은 기회들과
좋아진 그림 실력에도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고 해서 얻은 걸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
나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낮에 너 시간 많으니까 이것 좀 해."
“네가 바쁘긴 뭐가 바빠. 애도 어린이집 갔는데."
“애 키우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 그래.”
"집에서 맨날 그림이나 그리고... 그게 돈이 되긴 해?"
"일이 들어왔다고? 얼마나 주는데?"
"차라리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
실제로 이 말들은 내 부모에게 직접 들은 말들이다.
걱정되는 마음에 좋은 의도였든 아니든 그 말 들은 나에게 생채기를 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들을 자주 들을 경우
자존감이 낮아진다는 것을 다행히도 결혼을 통해 인정해 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서야 알았다.
삶에 있어서 어떤 일에든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주는 사람이 가족 중에 있다면 그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
아직 행운을 만나지 못해 힘든 사람이 있다면 내가 위로받았던 남편의 말을 대신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