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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제이]
가족과 떨어져 밴쿠버에서 지내는 첫해에는 너무 바빴다. 덕분에 그리움을 느낄 새는 없었지만 몸과 마음이 지쳤다고 해야 할까. 독립이라는 단어를 쓰기는 하지만 사는 지역과 집만 바뀌었을 뿐, 다른 한국 가정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지혜는 지출의 대부분을 부모님께 지원받고 있는 실정이다. 부모님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해서 지혜는 더 문제라고 여기고 있다. 밴쿠버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게 확정되자 지혜의 마음가짐에 조금의 변화가 찾아왔다. 완벽한 독립은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부모님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면서 조금씩 경제적인 부분까지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서 지혜가 공부하고 생활하기 편하도록 룸 셰어보다는 홈 렌트를 해 준다고 하셨을 때, 방이 더 많은 집으로 구해 달라고 요청했다. 룸 셰어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홈 렌트를 통해서 마스터가 되어 룸 셰어를 하는 게 지혜의 목적이었다. 나이가 비슷한 대학생들과 집을 함께 사용하면 서로 의지도 되고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더불어 생활비도 아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부모님을 설득했다. 그래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를 구하는 데 성공한 지혜는 부모님께는 가장 큰 방인 마스터 룸을 지혜가 쓰고 나머지 방 두 개를 내놓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방 세 개를 모두 내놓았고, 자신이 거실에서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지혜는 눈앞에서 바로 해결해야 할 학교와 친구 말고는 큰 고민 없이 넉넉하고 귀하게 자랐다. 심지어 즐거운 날들이 많았는데 외국계 기업을 다니는 아빠가 시애틀 지사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지혜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지혜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 온 식구가 시애틀로 이사를 왔다. 언제까지 시애틀에 살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가장 걱정이던 엄마는 오히려 즐거워하며 시애틀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지혜의 미래를 위해서 온 가족의 시애틀행이 기꺼이 이루어졌는데 지혜는 한국과는 다른 미국의 생활에 초기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언어는 둘째치고 문화적인 차이라고 해야 하나, 미국인 친구들의 생각과 하루의 생활이 한국의 친구들과는 많이 달라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다행히 지혜의 꼼꼼한 성격은 곧 주위를 유심히 살펴 지혜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목록화해서 실행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지혜는 모르는 게 있으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며 물어보는 아이였다. 시애틀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편이다. 그럼에도 지혜가 다니던 학교는 비싼 등록금 탓인지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 학생이 별로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모님이 그런 학교가 있는 동네를 고심해서 선택했다고 한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동양의 아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룹을 이루어 함께 해야 하는 과제가 많았던 게 큰 몫을 했다. 수업 중에도 그룹으로 하는 활동이 많았는데 어디든 지혜를 넣어주는 그룹은 꼭 하나씩 있었다. 동양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학생도 있었고, 지혜의 기죽지 않는 모습에 호기심을 표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듣기와 말하기로 완벽한 소통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혜에게 관심과 호기심을 보이는 친구들 사이에서 지혜의 어학 실력이 조금씩 쌓여갔다. 무엇보다 진욱의 도움이 컸다.
어른들의 모임을 통해서 한국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아이들 중의 하나가 진욱이다. 대부분이 지혜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었는데 진욱만이 유일하게 동갑내기였다. 시애틀에 정착한 지 오래된 진욱의 가족에게 지혜 엄마는 많이 의지했다. 집이 가깝기도 했고 엄마가 진욱의 엄마에게 언니 언니 하면서 살갑게 대해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진욱은 늘 넉넉한 웃음을 지었고 아이들은 진욱을 잘 따랐다. 그 넉넉함 속에 약간은 삐딱한 포즈가 함께 있다고 지혜는 느꼈다. 한국말을 다 이해는 했으나 한국어로 말을 할 때에는 어딘지 모르게 약간의 어눌함이 느껴졌다. 미국물 먹은 아이구나, 지혜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겨울에는 여행을 가고 싶었다. 지난 몇 년간 입시와 유학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입시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을 텐데 과연 힘든 선택을 한 건 아닌지 괜히 돌아가는 길을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지혜는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모든 과정은 지혜의 목록화에서 하나씩 이루어졌다. 밴쿠버에서 입학 허가서가 날아왔을 때의 기쁨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지혜 자신이 스스로 하나를 해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자신의 터전을 만들어 나갈 거라는 다짐도 했다. 부모님의 재정적인 지원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그 넓은 미국에서 수많은 좋은 대학을 마다하고 굳이 캐나다로 넘어간다는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의 다른 지역이 아니고 시애틀이었다. 캐나다의 다른 지역이 아니라 밴쿠버이다. 지혜의 생각과 다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녀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단 한 사람이 필요했다. 아직도 이해가 완전히 가는 건 아니고, 아쉬움과 서운함도 있지만 나는 네 편이야,라고 진욱은 말했다. 진욱은 시애틀을 떠나 다른 주의 대학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부모님 집에서 나와 룸메이트들과 생활하기 시작했다. 한국 아이들은 진욱과 지혜가 한 그 선택을 후회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혜는 비슷하지만 미국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는 캐나다에서 대학 생활에 적응해야 했고, 공부를 해야 했고, 파트타임으로 일도 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집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하우스 룰을 고심하여 만들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생활을 통해 거친 시행착오도 겪어야 했다. 부모님께 말씀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첫해의 대부분은 무서웠고 절반 이상의 시간은 울음을 참거나 터트리는 쪽이었다. 밴쿠버에서 생활한 지 2년째에 접어들면서 지인들과 친구들이 늘어 겨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다. 생각과 마음이 맞는 사람을 약간은 구별할 줄 알게 된 건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얼마나 부모라는 든든한 보호자 아래에서 순한 양처럼 살았는지 절절히 느끼며 성인기를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대부분이 영어로 발음하기 쉬운 이름으로 자신을 칭하곤 했는데 진욱은 보기 드물게 발음이 어려운 한국 이름을 고수하고 있었다. 지혜도 원어민들이 ‘혜’ 발음을 어려워해서 간단하게 이름의 영어 스펠링 첫 자인 ‘J’를 발음해서 제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름에 타협을 하지 않는 진욱의 그런 고집스러운 모습이 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지혜는 생각한다. 자신이 진욱을 믿게 된 것도 기대게 된 것도 모두 이름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자주 만난다고 하더라도 시애틀과 밴쿠버는 지혜와 진욱이 걸어서도 만났던 이웃 동네가 아니다. 또 아무리 멀어도 각자의 몸에서 뻗어 나온 보이지 않는 실로 살랑거리며 흔들려도 끊기지는 않을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서로 느끼고 있고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함께 하는 절대적이고도 물리적인 시간은 필요했고 그게 딱 이번 겨울이었다. 지혜와 진욱은 차갑고 깨끗한 겨울밤에 옐로나이프에서 오로라를 보면서 정신 바짝 차리자는 얘기를 나눴었다. 오로라의 경험은 앞으로의 날들에 어느 모로 보나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주저앉고 싶을 때는 영하 25도의 칼바람 속 오로라가 떠올라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때면 오로라의 푸른 기운이 생생하게 떠오를 것이었다. 물론 옐로나이프에서 여행을 하고 오로라를 직접 보면 또 어떤 마음이 들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이 지금 아니면 또다시 기회가 쉽게 오지 않을 거라는 조급함도 있었다. 하지만 다 엉켜버렸다. 초코 퍼지처럼 들러붙었는데 달콤함은 없고 진득한 씁쓸함만이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