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라라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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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떤 통증이든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 라라 소소 69

by Chiara 라라 Mar 12. 2025

 너는 느린 사람이다. 숨도 느리게 쉰다. 잠에서 깨어나는 걸 어려워하고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약속에도 매번 늦는다. 네가 있는 곳, 네가 사는 곳으로 가도 언제나 기다려야 한다. 천천히 나온 날에도 신기하게 그만큼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주변을 서성이다 보면 너는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온다. 그리고 사과의 말없이 부끄러운 듯,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이다. 너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상이다. 화가 나지는 않는다.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괜찮다. 약속 시간에 있어서 내가 조금 빠르게 도착하는 사람이듯이 너는 그저 느린 사람이라고.


 봄, 여름, 그리고 가을에는 괜찮았다. 겨울이 되면서 약간 난감해졌다. 춥기도 하고 마땅히 들어가 있을 곳이 없어서인데, 차라리 카페로 가면 되겠지만 그러면 만나는 시간이 더 늦어지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너는 내가 카페에 있는 걸 알면 안심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너를 불안하게 하려고 밖에서 기다리는 건 아니다. 자주 보지 못하니까 단지 그 이유뿐이다. 너는 추위를 잘 타면서도 잠바 안에 입는 옷은 사계절이 다 비슷하다. 두꺼운 옷을 입어도 추워하고 입술이 파랗게 변한다. 겨울에는 따뜻한 곳을 찾아야 한다. 그럼에도 감기는 내가 더 잘 걸린다. 어린 시절부터 계절에 상관없이 마스크가 필수였다. 약국에서 파는 부드러운 면 마스크를 쓴다. 분홍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는데 둘 다 색이 강렬하다. 파스텔 톤으로 차분한 색의 마스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인터넷을 찾아보면 어디에 있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막상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거에는 무심하고 둔감하다. 너는 내가 준 마스크를 보며 웃었다. 빨간색도 파란색도 모두 시골스럽다고 말하며 웃었다.




 너는 자주 앓는다. 너는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미세한 통증을 느낀다. 병원에서는 몸살이라고 말했고, 신경성이라고 말했으며,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편안하게 쉬고 잘 먹고 잠을 잘 자라고 말했다. 진료비를 내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의사에게 듣다가 너는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기로 했다. 감기에 걸려도 두통이 심해도 눈이 아파도 피가 흘러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너는 어떤 통증이든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너는 잠을 잘 자지 못한다. 한번 깊게 잠들면 잘 일어나지 못한다. 며칠을 서너 시간씩밖에 못 자다가 그다음 어느 날에 픽 쓰러지듯 누워 열 시간을 넘게 잔다. 하루 종일 잘 때도 있는데 불편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몸을 옆으로 말고 잔다. 다리와 팔, 가슴, 그 작은 사이 공간에는 낡아빠진 인형이 담겨있다. 여름날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선풍기 바람을 싫어하는 너는 땀을 삐질 흘리면서도 같은 자세로 인형을 안고 잔다. 턱이 닿는 부분에 때가 타고 전체적으로 색이 바래고 구멍이 조금씩 뚫려있는 인형이 너의 눈에는 그리 낡음으로 보이지 않는다. 너는 굳이 밤에 잠을 자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허리의 통증, 반복되는 악몽으로 밤을 어려워하다가 밤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너는 생각한다. 낡은 인형을 가만히 끌어안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깜박이며 허공에 시선을 멈춘다.




 너는 쨍쨍한 햇볕과 파란 파도가 나오는 무더운 여름이 배경인 영화를 보고 또 본다. 해변에는 젊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선탠을 하고 공놀이를 하고 맥주를 마시고 헤엄을 치고 서로의 몸이 자연스럽게 부딪힌다. 그들의 표정은 밝고 영화는 선명하다. 낮과 어울리는 영화를 너는 집요한 표정을 지으며 밤에 본다. 프랑스어는 하나도 모르면서 자막을 틀어놓지도 않고 빠른 노래 같은 대화에 골몰한다. 밤이 더 깊어지면 소리를 없애고 화면만 바라본다. 깜깜한 어둠 속에 파란 바다가 있다. 한밤중에 낮이 떠 있다. 고요함은 너를 압도하고 소리 없이 떠드는 그들에게 너는 말을 걸려고 하다가 입을 굳게 다문다. 그렇게 서서히 새벽이 밝아오고 너는 눈이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조금 잠이 들었다가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깜짝 놀라서 눈을 뜬다.


 너는 여전히 똑같은 꿈을 꾸고 있다. 그 꿈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너만이 알고 있고 너만 괴로워한다. 그럼에도 그 꿈이 없는 잠을 너는 상상하지 못한다. 꿈은 네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네가 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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