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아에게

<친밀한 이방인>, 정한아

by Chiara 라라

정아야,

오랜만에 진득하니 앉아서 글을 썼어. 눈이 좀 아프다. 그래도 오늘은 어느 정도는 참을 만 해.


며칠 전에는 햇살이 따스해서 산책을 했는데 자그마한 하얀 꽃과 노란 꽃이 피고 있더라고. 이제 봄이 오는가 봐. 거기는 이곳보다 더 따뜻할 테니 더 다양한 꽃들이 피었겠지? 벌써 활짝 핀 건 아니라고 얘기해 줘. 내 마음에는 아직 겨울의 스산한 기운이 남아있거든. 이제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책상 위에는 다 시들어서 고개를 떨군 프리지어가 있어. 엄마 퇴원 기념으로 선물한 건데 어쩌다 보니 내가 가지고 있네. 작은 꽃망울들이 끝까지 활짝 필 줄 알았는데 피지 못했어. 그대로 망울 진 채로 고개를 떨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 조금 더 힘을 냈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를 위한 좋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응원해주고 싶었거든. 어쩌면 내가 지불한 금액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프리지어가 빛을 보이기를 바랐던 것 같아. 그 망울들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데 활짝 피었던 꽃들과 내외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해. 그래도 노랑이라는 색 덕분에 종종 오랫동안 쳐다보고 있어. 노랑이라는 생생함의 색. 살아있는 것과 같은 기분. 괜찮다고 말해주는 듯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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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엄마 입원한 걸 얘기하지 않았는데 퇴원 얘기를 먼저 했네. 갑자기 놀랐겠어. 나도 놀랐거든. 엄마도 놀랐을 거야. 늘 괜찮다고만 하시지만 그 새벽에 혼자서 택시를 부르고 응급실로 가실 때까지 얼마나 힘드셨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 나도 코로나 백신을 맞고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을 때 전화기는 멀리 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혼자 느꼈던 갑작스러운 공포가 되살아났어. 엄마는 그러지 않았어야 하는데 말이야. 엄마는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아. 그냥 숨 쉬는 게 힘들었고, 조금씩 더 심해지는 것 같아서 택시를 불렀고, 응급실에 갔다고만 말했지. 119를 부를 정도가 아니었기에 구급대원들을 힘들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게 나에게 불투명한 목소리로 얘기했던 엄마의 반박이야. 엄마 성격이 여기서 나오는 거 있지. 평생을 이렇게 남에게 피해 주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성격. 이런 건 내가 엄마를 닮았지.


자기 발로 유유히 걸어 들어와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고 차분하게 말하는 사람에게 응급실에서는 조치를 취할 게 크게 없었던 것 같아. 다른 환자들에게처럼 피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수액을 맞추는 거지. 또 혈압을 재고 이곳저곳을 꾹 꾹 눌러보는 거야. 여기는 어떠세요? 숨 쉬는 건 조금 편해지셨나요? 물어보면서. 엄마 혈압이 많이 높았나 보더라고. 저녁에 혈압약을 잘 챙겨드셨다고 하니까 더 이상의 약 처방은 없었던 것 같아. 그리고 기다리는 거야. 혈압이 떨어질 때까지, 또 숨이 안정적으로 제대로 쉬어질 때까지. 숨은 늘 쉬는데 제대로 쉬어진다는 말이 어색하게 들려. 애써서 쉬어야 하는 게 숨이라면 하루하루가, 아니 일분일초가 얼마나 노력하는 삶이어야 할지 진득한 무게감이 느껴져. 숨 쉬는 것조차 힘을 들여야 하다니. 세상에 힘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내 몸에서조차.


정아야,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니?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얘기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경험은 하지 않는 걸로 하자.


그 드라마 있잖아, '안나'라고, 리플리 증후군에 대한 드라마. 네가 나한테 이거 너무 재미있다고 꼭 보라고 틀어주고서 너는 밖에 나갔다 왔었어. 그때 네가 첫 화를 틀어주고 나갔고 네가 돌아오기 전에 첫 화는 끝났지만 두 번째로 자동으로 넘어가지 않아서 그냥 멈춰놓고 책을 읽고 있었거든.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너는 손에 치킨을 들고 돌아왔어. 네가 좋아하는 빙수도 함께. 그러니까 그때는 여름이었다. 어쩌면 여름이 이제 막 시작 되던 시기였을 거야. 일 년 중에 빙수를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여름을 너는 제일 좋아하지. 그런데 덥다고 또 싫어하기도 해. 나보다 더위를 많이 타지도 않으면서 맨날 덥다고 하다니.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앞에서 덥다고 하는 너를 보면 난 왠지 부럽기도 했어. 아무튼, 그 드라마 원작 소설이 <친밀한 이방인>이라는 소설이야. 그 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어. 요즘에는 전자책 도서관이 잘 되어 있어서 도서관에 가기 힘들 때에는 전자책 도서관을 둘러보거든. 어떤 책이 있나 살펴보고 그날그날 눈에 띄는 책 중에 대출할 수 있는 책을 다운로드해서 읽곤 하지. 그날은 신착 자료 목록을 주르륵 넘기다가 한 참 뒤에 이 책을 발견했어. <친밀한 이방인>. 친밀한데 이방인이라니 제목부터가 너무 그럴싸하지 않아? 사실 난 이 소설이 별로 끌리지 않았어. 네가 '안나'에 그렇게 열광을 할 때에도 북스타그래머들이 그렇게 재미있는 책이라고 우후죽순 피드를 올릴 때에도 별로 관심이 생기지 않더라고. 친밀하다는 단어가 마음에 안 들었을지도 모르고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나 자신이 비쳐서 그랬을지도 몰라. 그때는 그랬어. '안나'가 방영하던 그 여름날. 그리고 그 이후 가을이나 겨울까지도.


이 책은 2017년에 출간된 책인데 드라마로 인해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더라. 역주행된 책이라고나 할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책 속에 책이 나와. "난파선"이라는 제목의 책. 그 책의 진짜 소설가를 찾는 신문기사가 실리면서 소설가인 '나'가 자신의 소설을 도용해서 소설가의 삶을 살았던 '이유상'을, '이유미'를, 혹은 '안나'를 추적해 가는 내용이야. 책을 읽으면서 이게 리플리 증후군인가, 의아했어.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면 네이버 지식백과에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은 "현실 세계를 부정하고 허구의 세계만을 진실로 믿으며 상습적으로 거짓된 말과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를 말한다. 리플리 효과 혹은 리플리병이라고도 한다. 거짓이 탄로 날까 봐 불안해하는 단순 거짓말쟁이와 달리, 리플리 증후군을 보이는 사람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한 진실로 믿는다."라고 나와 있거든. 재미있는 건 이 증후군이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의 주인공 '리플리'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거야. 책과 책과 책. 책 속의 책과 책 속의 주인공의 성향이 나타내는 증후군이 책의 이름과 관련되었다는 것.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너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어. 내가 사전을 찾아보고 농담을 다큐로 받아들이면 넌 눈동자가 흔들리며 하하하하 헛웃음을 짓곤 했는데. 그런 네 모습이 그립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책도 리플리 증후군도 안나도 아니야. 그냥 그 "난파선"이라는 책 속의 소설이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경험과 매우 비슷한 느낌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물론 너는 책을 읽지 않을 게 뻔하고 '안나'를 다시 볼 생각을 하지도 않을 걸 알아서 그래서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갑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


바다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난파선까지 깊숙이 내려가면 빛이 하나도 닿지 않을 거야. 깊숙한 바닷속까지 빛이 들어오지는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 깊고 어두운 바닷속에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스스로 빛을 만들어 내는 그런 생물도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사람이 랜턴을 켜고 바다 아래로 들어간다면 그런 생물들은 숨어버리겠지. 더 깊은 바닷속으로. 수압이라는 게 있잖아. 물속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그런 압력. 깊이 들어갈수록 압력을 더 많이 받을 테니까 온몸이 수압으로 눌려 갑갑하면서 시야가 흐려지고 주위가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 그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을 때 느끼는 그런 기분일 거야. 난 그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 내가 직접 느낀 건 아니지만 갑자기 그 소설 생각이 나서 너에게 얘기해 주고 싶었어. 엄마한테는 얘기 안 했는데, 엄마 옆에 있을 때는 그 생각이 나지 않기도 했고 만약에 떠올랐다고 하더라도 왠지 엄마한테는 말하기 무서워지는 광경인 것 같아. 앞으로도 얘기 안 할래.


앗, 그러고 보니까 <친밀한 이방인>을 쓴 작가님 이름이 정한아야. 정아 네 이름이랑 많이 비슷하다. 가운데 '한' 자만 빼면 정아네. 그래서 친밀하면서도 오히려 가까이하기 어려운 작가님이었을까.


근데... 정말 오랜만이다 정아야. 난 이제 좀 쉬어야겠어.


미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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