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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랑바쌈 Aug 20. 2022

어느 저녁

집으로 가는 길

7:20 pm.

구내식당 가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반찬통 네 개 중 하나는 비었을 테고, 씹을만한 고기 건더기는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야근은 자정을 넘길 각인데 대충 때우긴 곤란하지.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오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건널목 파란불이 깜박거리고 익숙한 빨간색 버스가 정류장에 대기 중이다. 재빨리 올라탔다. 운이 좋은 저녁이다. 신호 딱, 버스도 딱, 빈자리는 떡.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창밖으로 사방이 논밭이다. 익숙한 고층아파트들이 온데간데없다. 세종 BRT는 종점이 대전이다. 세종 안에서 못 내리면 대전까지 직행이다. 중도하차는 불가.  황급히 두리번거리다 털썩 주저앉는다. 속이 타들어 간다. 집에서 저녁 한 끼 먹고 오려 했을 뿐이고.


지잉. 진동이 울렸다 '배터리가 15% 남았습니다' 내 몸에 남아있는 기력과 비슷하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허탈. 답답함과 지루함의 경계를 오간다. 해탈.


대전에 도착했다. 마침내.

도시는 어두웠다.

입추가 지나 해가 사뭇 짧아졌나 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반대편 정류장으로 건너가다가.. 잠시 주춤했다.


집에 가서 저녁 먹기는 글렀고, 일은 포기할 줄 모르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냥 여기서 먹고 가자. 아무래도 맛집은 대전이지.


식당은 즐비한데 들어가기가 못내 꺼려졌다. 혼밥 하기 참 어렵지, 한국은.

4인 테이블을 혼자 차지할 정도의 소박한 뻔뻔함이 내겐 없다. 점심시간에 두 사람이 와서 2인 테이블 제치고 4인 테이블에 앉는 걸 지켜보는 것조차 마음이 불편하다. 눈칫밥을 먹고 자란 탓일지도 모른다.


문득 10년 전 도쿄 출장 때가 떠오른다. 시부야 밝은 달 아래 맛집 찾아 유랑하던 그 밤들. 덮밥 한 그릇, 라멘 한 사발 받아 들고 후루룩 짭짭 최고의 한 끼를 해결하는 고독한 미식가들 사이에서 나는 전혀 외롭지 않았지. 불편하지도.


웬. 눈앞에 그런 비스무리한 식당이 나타났다. 백사장님이 만든 우동집이다. 세종에도 우후죽순 생겨나는 그 식당. 우리 동네에서도 한 번도 못 가본 그 분식당을 지금, 여기서?

키오스크에서 제육덮밥을 주문하고 주방과 맞닿은 기다란 테이블 정중앙에 앉았다. 덮밥과 우동이 나왔다. 우동은 덤이다. 국물 한 숟갈에 몸이 녹아내렸다. 평범했지만 위로를 주는 맛이다. 국물이 모자랐다. 좀 더 달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국물 리필됩니다' 이렇게 쓰여 있지 않으면 나에겐 불가능한 미션이다.

'당일 만든 육수는 당일 폐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주방 벽엔 대신 이렇게 쓰여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폐기를 원칙으로 한다니. 원칙은 그런데 실천이 안 될 때가 많다는 것인가. 그냥 폐기한다고 했으면 어차피 폐기할 거 좀 더 달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거 먹으러 세종에서 왔어요. 아님, 졸다가 대전까지 왔어요. 뭐가 국물 동냥에 어울리는 멘트일까. 잠깐  고민하다 포기했다. 우동 면발이 국물 뜨는 숟가락에 걸리적거렸다. 면이 없었으면 국물이 좀 더 많았을 텐데.


9시 pm.

돌아가는 버스 안. 창밖은 한껏 어둡다. 어디쯤인지 모르지만 상관없다. 돌아가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니까. 배는 부르고 졸음이 밀려온다. 텅 빈 버스 안에는 기사 아저씨, 귀에 이어폰을 꽂은 여고생, 그리고 나 셋 뿐이다. 맨 뒷자리에 앉아 낮은 음자리로 속삭이듯 말한다.


아저씨, 집으로 가주세요. 회사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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