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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리 Sep 19. 2023

왜 꼭 하산할 때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는 걸까

예전에 북한산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문득 헤어진 여자 친구가 미친 듯 생각나서 그 자리에서 전화한 적 있었어. 때마침 그녀의 회사와 가까운 지점이었고, 우리는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재회하고 얼마간 다시 만났었지.

 어제 충주호를 내려다보며 금수산을 하산하는데, 최근에 헤어진 여자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거야. 함께 잘 때 바로 옆에서 들리던 새근새근 숨소리, 악몽 꾸다 깼을 때 그녀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는 안도감, 두 팔 벌리면 매트리스 위를 데굴데굴 굴러와 착 감겨 안기던 종잇장처럼 얇은 몸. 아침에 사랑한다고 말하며 입 맞춰주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다고 떼쓰던 얼굴. 기분 좋게 샤워하고 나와서 나를 부르던 평소보다 세 옥타브 높은 그녀의 목소리가 아프게 나를 휘감았지.

 비가 와서 그랬나. 우중산행이라 온몸은 젖었고 지쳤고,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가 깼을 땐, 일행에게 운전하느라 고생했다고 입을 열기 힘들 정도로 목에 편도선이 부어있었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눈에 보이는 편의점마다 들러서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에서만 의약품을 판다는 사실을 또 처음 알았네) 쌍화탕과 타이레놀을 기어이 찾아내 먹고 나오는 순간에도 비는 내렸고 나는 여전히 우산이 없었어.

그녀의 웃음소리가 아직 허공에 맴도는 깜깜한 집에 젖은 생쥐처럼 헉헉대며 도달했을 때엔, 나도 모르게 카톡 차단 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서 풀었다가 가까스로 핸드폰을 집어던졌어. 마치 장대비에 앞이 안 보이는 차가 벼랑 끝에서 가까스로 멈추듯.

 왜 산을 오를 땐 조금도 생각나지 않던 헤어진 사람이, 산에서 내려오는 순간부터는 간절히 떠오르는 걸까.

우선 생리학적으로 생각해 봤어. 올라갈 땐, 이를 악 물고, 바늘 하나 찔러도 들어갈 구멍이 없는 탱탱한 허벅지 근육이며 거친 호흡이며 긴장된 마음 상태 등에 경도되다 보니 그 어떤 상념도 비집고 들어오기 어렵지.   

 하지만 정상의 성취감을 맛보고 나서, 그 긴장감을 다 태워버리고 나서, 터벅터벅 힘없이  내려올 때 마음은 안심을 넘어 방심의 상태가 되는 거야. 그때 헛디뎌서 발목을 삐끗하기도 하고, 땅을 구르기도 하고 어제의 나처럼 감기도 쉽게 걸려버리는 거지. 면역력 떨어진 내게 그녀 생각도 쑤욱 밀고 들어오는 거야. 감기 바이러스처럼.

 어때, 그럴듯해?
아니면 이런 생각도 해봤어.

 사람이 산에 오른다는 건,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본능에 따르는 게 아닐까. 그래서 구름 위로 올라갈 때까지 걷고 또 걷지. 인간 그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어 하며 천상을 생각하지.

하지만 반대로 내려오면서는 무슨 생각을 하겠어

올라가면서 천상을 생각했다면 내려오면서는 지상을 생각할 수밖에. 지상에 누가 있어? 누가 기다리고 있어? 애써 외면했던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거야. 나는 절대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지면에 발 디디고 살아야 하는 평범한 사람이구나. 그녀라는 중력에 얽매여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구나, 하산하며 발을 디딜 때마다 뼈저리게 깨닫는 거지. 얼마나 아프겠어.

지구의 중력만큼 그녀가 나를 사랑했던 거야.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거야. 그럼 됐지. 일생일대의 사랑을 한 거잖아.라고 중얼거리며 샤워기의 뜨거운 물을 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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