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
"루야~"
3학년이 된 첫날 우리는 반 구호를 연습했습니다.
선생님이 '할렐~'이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루야~'라고 대답하고 선생님에게 집중하는 거지요. 나를 포함한 모두는 이 구호가 그동안 들었던 다른 반 구호보다 신선하다고 느꼈습니다. 뭐랄까 입에 좀 잘 붙는 것 같기도 했고요. 이 구호 하나로 우리는 선생님의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선생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느낌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10살이라는 나이는 무엇이든 단정 짓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다른 친구들보다 똘똘하다고 생각하는 저는 제외입니다.
오늘은 수요일입니다. 4교시만 하고 파하는 날이에요. 수업을 덜해서 기분 좋기도 하지만 도시락을 안 싸와서 배도 고픈 어정쩡한 날이기도 해요. 우리는 항상 운동장에서 그 남은 날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어요. 남자들의 세계에서 거창한 계획은 언제나 그렇듯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이제 지긋지긋한 저학년에서 벗어난 거냐?"
"야. 3학년은 넘어야 저학년이 아니지."
"이제 좀 운동장에서 축구할 수 있으려나?
"야. 이번에 들어온 1학년 들 엄청 개념이 없더라."
"왜? 아직도 유치원에서 못 벗어나서 자기들 마음대로지?"
"여기가 자기들만 이용하는 줄 알더라고. 나름 유치원에서는 고학년이었다나."
"세상이 정말 요지경이다 야. 우리 1학년 때는 선배들이 공차 면 자연스럽게 자리도 비키고 그랬는데.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핏덩이 같은 것들이..."
이 말을 하는 친구는 준민입니다. 준민이는 우리 반에서 가장 얼굴이 까무잡잡한 친구예요. 우리 남자들 세상에서는 얼굴이 가장 까무잡잡하고 거무 댕댕 한 친구들을 우러러봅니다. 그만큼 밖에서 많이 놀고 동네를 넘어서 이웃 동네도 넘나드는 그런 친구니깐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준민이가 얘기하면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끄덕했습니다. 아마 준민이가 가진 거무 댕댕 한 얼굴에서 나오는 어떤 그럴듯함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듯함. 참 어정쩡한 말이지만 10살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형이 말이야. 지금 군대에 있어."
"와. 형이 벌써 군대에 갈 나이야?"
"그럼. 우리 형이 그러는데 군대에서는 총도 쏜대."
"그럼. 준민이 너도 쏠 수 있냐?"
"당연하지. 우리 형이 말 잘 들으면 쏘게 해 준다고 했어."
"준민아. 나도 한번 쏘면 안 되냐?"
"내 말 잘 들으면 쏘게 해 줄게."
"그래. 뭐든 말만 해."
저도 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준민이에게 해줄 것이 별로 없었거든요. 준민이의 어떤 말이라도 잘 들어주는 저 친구는 상용입니다.
이상하게 상용이는 매일 동전을 찰랑찰랑 거리며 오락실에 들락날락하는 친구입니다. 그 동전이 끊임없이 나오는 상용이의 주머니는 모든 친구들이 선망하는 대상이었어요. 도대체 상용이는 왜 동전이 저렇게 많은 걸까요? 저는 상용이 집이은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저렇게 많은 동전이 있는 곳이라면 은행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학교를 파하면 연무 오락실로 향했습니다. 오락실로 가기 위해서는 집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 시장통으로 가야 했어요.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서는 지나가더라도 지나갈 일이 없는 곳에 연무 오락실이 있었습니다.
"상용아. 진짜 으스스하지 않냐?"
"뭐가?"
"오락실 가는 길 말이야."
"그러니깐."
"왜 오락실은 항상 이런 곳에 있냐는 말이지. 건물은 우중충하고 골목길은 좁고 말이지."
"그러니깐 말이야. 그냥 학교 문 앞에 딱하고 있었으면 가기도 편하고 그럴 건데 말이야."
세상에서 오락실이라고는 연무 오락실에 가본 일 밖에 없었던 우리는 왜 세상 오락실은 그런 곳에 있느냐고 불평을 해댔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가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지요. 거무 댕댕 한 준민이도 아마 옆 동네 오락실은 가보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에는 아이들의 돈을 뺏는 무서운 형들이 더러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네가 주인 할머니에게 말 좀 해서 옮기라고 말 좀 해봐."
"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주인 할멈이 얼마나 무서운데."
"너도 주인 할머니랑 얘기 안 해봤냐?"
"아무도 말해 본 사람이 없다잖아."
"그러니깐. 말한 것을 본 적이 없으니깐 말이야."
"동전 바꿀 때마다 문을 드르륵 열면 내가 오백 원짜리 동전을 몇 개 가지고 오는지 알고 딱 바구니에 주더라니깐."
그 이유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상용이는 항상 오백 원짜리 동전 세 개를 바꾸기 때문입니다. 연무 오락실에서 가장 어린 우리들을 아마 주인 할머니는 분명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그것보다 상용이가 매일 천오백 원 이상을 쓴다는 점이 더 놀라웠습니다. 나중에 상용이에게 물어볼 참입니다. 예전에도 상용이에게 물어보려고 할 때마다 상용이는 어물쩍 넘어가곤 했거든요.
오락실의 문이 보입니다. 진한 갈색 알루미늄 틀에 불투명한 유리창이 안을 가리어 줍니다. 문에 붙여져 있던 '연무'라는 테이프는 이미 떨어져 테두리만 보입니다. 당연히 '오락실'이라는 테이프는 흔적도 없습니다. 오락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연무 오락실은 관심이 없다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곳에 이런 곳이 있을지도 모를 만큼요.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띵동 띵동, 드르륵, 오락실 소리가 문간 밖으로 유유히 우리를 찾아옵니다. 분명 나를 찾아왔어요.
"야 오늘은 메탈 한판 때리자."
"좋아. 준민이랑 같이 할란다. 준민아 내가 내줄게."
"그래. 내가 특별히 너를 좀 더 오래가도록 보살펴줄게."
물론 준민이는 누구를 보살펴주는 성격은 아닙니다. 아직 자기 혼자 살아남기에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준민이는 자기 때문에 다음 단계까지 갔다고 우기곤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