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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은 고양이에 가까운

by 우보

개학하고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오랜만에 연무 오락실에 갈 수 있었습니다. 학기 초라고 우리들도 나름 바빴던 모양입니다. 담임 선생님의 구호에 정신없이 '할렐~', '루야~'도 계속해서 외쳤고요.


첫 한 달은 새로운 친구들과 좀 더 관계를 갖고, 서로 눈치도 살핍니다. 동물에 비유하면 개에 가까운 우리들이지만, 3월은 고양이에 가까워지는 그런 날들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색합니다. 의도하지 않는 탐색. 서로 보이지 않는 킁킁 거림입니다.


우리의 킁킁거림에 반응한 친구는 윤기입니다. 같은 종류는 끌리는 법입니다. 우리 셋과 윤기는 분명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에게 한 달간은 오락실 가자고 말하기가 정말 쉽지 않았어요. 특히 여학생들은 오락실이라는 소리만 들어도 선생님에게 이를 것 같았거든요.


윤기는 우리를 이해하는 듯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땅따먹기를 할 때 인정사정이 없었거든요. 준민이는 오랜만에 상대를 만난 듯 보였습니다. 윤기는 분명 우리와 함께 배를 탈 작정이었습니다.


"윤기야. 너 스트리터 파이터 하냐?"

"그럼. 한 판 뜨자."

"넌 캐릭터 뭘로 하냐?"

"난 그날그날 달라. 오늘은 왠지 장기에프로 하고 싶다."

"그래? 잡으러 올 때 어류겐 맛을 보여줘야지."

"오늘은 처음이니깐 내가 살살 잡아줄게."


윤기와 준민이는 같은 유형이라는 걸 알아보았습니다. 둘이 서로 맞붙는 게임을 하면 온갖 기술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메탈을 같이 하면 가보지 못했던 레벨까지 갈 거라고 상용이는 은근 기대했지요. 그 당시의 우리에게 기대와 희망이란 보이지 않는 게임 속 레벨을 한 층 한 층 올라가는 거였습니다. 책이라든지, 공부라는 건 오직 책가방 안에서만 존재했지요. 90년대의 평범한 남학생들은 대부분 그랬을 겁니다.


"와. 여기 오락실 진짜 오락실 같다."

"뭐 가짜 오락실도 있냐?"

"전에 내가 다니던 데는 하얀색으로 새삥이 오락기였거든."

"연무 오락실은 다 검은색이야."

"그러니깐 아주 짱인데."

"짱이 뭔말이야?"

"요즘엔 짱이라고 해. 최고란 뜻으로.."


짱이란 단어가 우리의 머리에 각인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쓰기 좋은 우리들의 언어로 들어온겁니다.

어두운 오락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겹 더 어두운 오락기를 보면 왜 그렇게 마음이 들떴는지 모릅니다. 켜켜이 있는 오락기 기계는 우리들의 포르셰 그리고 벤츠였어요.


그날도 당차게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때, 주인 할머니가 오락기 아래 걸쇠를 열어 둔 채 수건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구석구석 안쪽을 닦는 모습에 우리는 왜 그곳을 닦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나만 궁금했을지도요. 다른 친구들은 빨리 자리를 비켜주었으면 하고 했을 겁니다.


"저기 할머니. 저희 이 게임하려는데 나중에 청소하시면 안 될까요?"


윤기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윤기를 빤히 보더니 새로운 인물을 본 양, 오락기 아래 걸쇠를 잠그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얘들아. 진짜 으스스하다. 오락기도 오래됐는데 저 할머니는 더 오래된 거 같아."

"말 조심해야 해. 저 할머니 진짜 무서워. 지금까지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그러니깐. 그렇지 않아도 무섭다야. 춘리의 얍얍으로 기분을 확 풀어볼까?"


그렇게 윤기와 준민이는 게임 속으로 빠져갔습니다. 뒤에서 나와 상용이는 윤기의 게임 실력을 평가할 때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자가 나오면 보는 입장에서는 정말 가슴이 콩당콩당 합니다.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정말 고민이 되거든요.



'오랜 우정이냐. 새로운 도전자냐.'


둘의 손놀림은 정말 비슷했습니다. 그냥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다다'

'다닥.'

'딱. 딱. 따닥.'


결국 장기에프에게 잡힌 춘리가 멀리 던져지며 게임은 끝났습니다. 준민이는 씩씩거렸지만, 새로운 친구에게 일부러 져 주었다며 큰소리를 쳤습니다. 평소 하던 류가 아니라 춘리로 고른 게 실수였는지도요. 게임은 끝났지만 다음 게임이 있다는 점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끝이 진짜 엔딩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다음 판이 있다는 기분을 느끼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건넛방에서 주인 할머니가 소리 없이 나오더니 문 쪽을 향해 손으로 툭툭 가리켰습니다. 문을 어떤 아주머니 한 명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얼굴의 근심은 어두운 오락실만큼이나 비등했습니다. 얼굴에는 인상이 잔뜩 어려져 있었고요.



'아. 상용이 어머니다.'


상용이를 제외하고 우리는 모른 척 다른 오락기로 어슬렁 걸어갔습니다. 상용이만 엄마를 향해 어그적 거리며 걸어갔고요. 귀를 잡힌 상용이는 쓸쓸하게 오락실 문 너머로 사라졌습니다. 아마 당분간 상용이의 동전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때 보았습니다. 주인 할머니가 아주 살며시 웃는 모습을요. 아마 처음이었을 겁니다. 언제나 웃음 없이 말없이 보았던 주인 할머니가 찰나나마 웃다니요. 그 짧은 순간 할머니는 우리가 상상하는 나이보다 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용이가 집에 가버려 김이 빠진 우린 오락실 문을 나섰습니다. 하늘 사이로 해가 벌겋게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꼭 땅이 해를 안고 내려가는 것 같았어요. 눈으로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많지 않다는 것을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저물어가는 해는 집으로 가야 한다는 암묵적인 신호였어요.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린 더 늦게까지 같이 보낼 수 있을 겁니다.


"얘들아. 잘 가. 내일 보자."

"그래. 내일은 뭐 하고 놀지?"

"할 일도 없는데 주먹야구나 하고 놀자."

"주먹 야구 하려면 여섯 명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그럼 일단 운동장에서 보자."

"그래."


일단 운동장에서 보자는 말은 그 하루동안 온갖 모험이 펼쳐진다는 의미입니다. 집으로 걸어가며 조금은 움츠러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아빠가 집에 일찍 올지 알 수 없었거든요.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조금씩은 알아갈 나이가 되고 있습니다. 뭔가 허전하고 조용한 느낌이 풍기는 집으로 가는 길이 오늘따라 더 길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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