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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에 퉤퉤

by 우보

집이 조용합니다. 집이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있어도 집은 침묵했습니다. 우리들의 소리와 흔적들을 집이 흡수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를 먹어버리는 집에서 나는 더욱 움츠러들게 됩니다.


아빠가 없는 공간에서 여느 집과는 다르지만 혼자 저녁밥을 준비합니다. 아빠가 아침에 끓여놓고 나간 시금치 된장국과 계란 프라이입니다. 10살 나이에 혼자 가스불을 켜고 요리를 하는 내가 대견합니다. 계란은 입안에 넣었을 때 노른자가 살짝 입안에 흘러야 제맛입니다. 촉촉함이 살아있거든요.


문득 계란 프라이를 먹다 보니 작년에 당한 수모가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옆 반이 된 용근이와의 일입니다. 용근이는 웃을 때 보이는 어금니가 깨져 있습니다. 얼굴에 주근깨가 여기저기 나고 눈은 작지만 만만치 않은 친구입니다. 키도 작은데 어쩌나 싸움은 잘하는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우스운 친구인지 모릅니다. 얼굴을 보면 바로 웃음이 나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캐릭터입니다.


어느 하루는 옆 동네인 자기 집에 가면 맛있는 계란 프라이를 해주겠다고 저를 꼬셨습니다. 도시락을 안 싸가는 날이라 배도 고프고, 힘도 없던 저는 끌려가는 망아지마냥 용근이를 졸졸 따라갔지요. 용근이와 저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있는 듯 보였을 겁니다. 앞서가며 한 번씩 뒤돌아 보며 용근이는 씨익 웃기도 했어요.


"용근아. 아직 멀었냐?"

"뭔 집이 이렇게 머냐?"

"이게 뭐가 멀어? 우리 동네는 우리 친척들이 모여 사는 특별한 동네라서 그래."


"응? 왜 친척들이 한 곳에 모여 살아?"

"예전에 먼 할아버지가 유명한 장군이었는데 이곳에 살기 시작해서 동네 사람들이 다 우리 친척이래."


"그래? 신기하다. 그래서 넌 싸움도 잘하는 거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말도 안 되는 이유였지만, 계란 프라이 욕심에 용근이에게 아부를 살살했어요.


그 특별한 동네에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노인들이 태반인 동네였거든요. 아이는 용근이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마을에 들어서자 오래된 집들이 보이고, 그중 그나마 번듯한 집으로 용근이가 들어갔습니다. 옛날 집처럼 마당이 있고, 대청마루도 있었습니다.


대청마루 아래에는 낫, 고무신 등 각종 잡동사니가 부끄러운 듯 깔려있었어요. 보이는 창고 같았습니다. 용근이는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어요. 일단 앉으라는 말도 없이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방으로 사라졌거든요.


"기다려봐. 내가 계란프라이 해서 가져올게."

"나는 어디에 있냐?"

"그냥 거기에 앉아있거나 마당에 서있으면 되지."


이때 이미 알아봐야 했지만 전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어요. 저는 가방을 멘 채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있었습니다. 대청마루에 앉기에는 지저분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마루 아래 부끄러운 듯 있는 여러 물품들이 저를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여기 계란프라이 다 됐다."


용근이는 꽃무늬가 그려진 접시에 계란 프라이를 두 개 담아왔습니다. 분명 하나는 제 것이지요.


"와 맛있겠다. 케첩도 뿌렸네?"

"그럼. 이 맛에 먹어야지."


그때였습니다. 정말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용근이는 갑자기 접시에 대고 침을 퉤퉤 뱉었습니다.


"퉤퉤. 하하. 이래도 계란프라이 먹을래?"

"야. 뭐 하는 거야. 침을 뱉으면 어떻게 먹어."

"더러우면 안 먹으면 되지. 안 먹을 거면 집으로 꺼져."

"야 미친놈아. 이런 황당한 일은 처음이다. 이 먼 동네까지 불러서는 이렇게 배신하냐?"

"혼자 집에 오기 심심해서 그랬다. 왜?"


이런 상황에서는 한바탕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집이 주는 위압감이 묘합니다. 이 공간은 용근이의 편이었습니다. 어른들은 없었지만 대청마루에서 내려보는 용근이의 장난기 있는 표정에도 정이 뚝 떨어졌고요. 저는 뒤돌아 집으로 향했습니다. 용근이 집에서 다시 학교로, 학교에서 내 집으로 걸어가는 길은 평소보다 두 배나 더 길었지요.


저는 길가에 난 강아지풀이나 이름 없는 풀꽃들에게 화풀이를 하며 걸어갔습니다. 용근이에게 속았다는 분노보다 계란 프라이를 먹지 못했다는 쓸데없는 기시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억울함을 얘기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슬펐습니다. 아빠는 그냥 저보고 참으라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용근이는 원래 장난기가 많고 깡다구도 세서 준민이나 상용이가 들어도 모른 척할 게 뻔합니다. 이런 날에는 일찍 잠이나 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고 나면 까먹겠지요.


그 뒤로 용근이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용근이와 함께 놀았던가 무엇을 했다는가 하는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친구와의 관계가 계란 프라이 때문에 사라졌습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용근이와 계속 우정이 이어졌을까요? 용근이는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면서 가까운 듯 먼 듯 그렇게 지냈습니다. 옆 반을 지나갈 때면 보이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먼 도시로 전학을 간 친구나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저녁을 먹으며 용근이에 대한 생각을 하는 중에 아빠가 들어오셨습니다. 아빠는 검은색 작업복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성실해서 공장장으로 빨리 승진해 아래 직원도 많습니다. 아빠는 조용히 밥그릇에 밥을 가득 담아 오셨습니다. 한 손에는 참치캔도 들고 있었어요. 참치 캔은 우리의 특식입니다. 아빠와 나는 많은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학교 잘 갔다 왔고?"

"응. 아빠는 오늘도 바빴어?"

"응. 오늘도 바빴지.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았고?"

"오락실에서 놀고 헤어졌어."


"그래. 오락실에서 나쁜 형들 만난 건 아니지?"

"응. 나쁜 형들은 없어. 바보 같은 형들만 있지."

"그래. 다행이다."


이렇게 몇 마디가 우리가 나눈 모든 대화입니다. 저녁 설거지는 아빠의 몫입니다. 아빠는 어린이는 설거지는 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밥은 제가 하지만요. 아빠의 입은 주로 닫혀있습니다. 하루에 해야 할 말의 수가 끝나면 꼭 입을 닫는 것처럼요. 세상에서 말처럼 무해한 것이 없다고 자주 얘기하셨거든요. 나의 학교생활은 모두 말로 이루어졌지만, 아빠의 생활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었을까요?


"아빠"

"응?"

"연무 오락실 알아?"

"알지. 아빠도 어렸을 때 거기 가곤 했어."


"오락실 할머니 말이야. 말을 안 하는 거야. 못하는 거야?"

"아빠 어릴 땐 말을 아주 많이 하셨는데? 아주 수다쟁이셨어."


"진짜?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럴 리가. 얼마나 말씀이 많으신 분인데. 그때는 할머니도 아니었지."

"그래? 이상하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게 말이 많았던 할머니가 왜 말을 안 하실까요? 아빠가 알던 할머니가 그 할머니 맞을까요?

혹시 평생 해야 할 말을 다 해버리셔서 입을 닫아버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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