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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운동장

by 우보

일요일엔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일요일 오후의 학교 운동장은 우리의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엔 선생님이 없었거든요. 어른이 없는 공간. 유일하게 완전한 우리들의 장소였습니다.


학교 끝나고 오락실, 한적한 운동장이 그랬어요. 그때는 그런 공간이 별로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어른이 되어보니 어른을 위한 공간도 별로 없더군요. 그 나이엔 항상 우리의 공간이 부족함에 갈증을 느꼈습니다. 운동장은 아주 넓었지만 나만 갖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욕심이 그득한 시절이기도 했지요.


운동장엔 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쪽 편엔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동네 아는 동생들, 잘 모르는 동생들, 마구 대드는 1, 2학년 아이들도 있었고요. 좋은 동네 형들, 무언갈 모의하는 듯한 형들도 있었습니다.


나쁜 행동을 하는 형들은 없었어요. 나쁜 형들은 운동장에서 놀지 않았거든요. 꼭 저쪽 동네 어귀 강가에 진을 치고 몰려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곳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담배도 피우고, 하루 종일 앉아서 무얼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형들이랑 누나들이랑 가물치 강에서 담배 피운다."

"그게 담배인지 어떻게 알아?"

"야 네모난 종이갑에 '도라지'라고 분명히 써져 있었어."


"담배 이름이 '도라지'냐? 이름 특이하네."

"그러니깐. 담배 이름들은 다 왜 그 모양이냐. '도라지'니 '백자'니"


"더 심한 이름도 있어?"

"뭔데?"

"우리 할아버지가 피우는 담배 중엔 '솔'도 있어"


정말 한국적인 이름들이었습니다. 담배 이름을 이렇게 지어놓다니요.

'가물치 강'은 우리가 지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가물치가 저녁이면 뭍으로 올라와서 잠을 잔다고 우리가 붙였습니다. 가물치는 뱀의 사촌이라고 준민이가 계속 우겼습니다. 밤에 강가에 가서 가물치를 보면 꼭 도망가야 한다나요.


"가물치는 뱀 사촌이야. 근처에 가면 물어."

"밤에 가면 꼭 도망가야 해."


"물고기가 어떻게 뱀처럼 무냐?"

"그럼 네가 한번 밤에 가서 가물치 만나볼래?"


가물치가 득실대는 그런 강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형과 누나들이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형, 누나들은 나쁜 선배들이 아니었습니다. 가물치, 담배 같은 이미지들이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어선 안된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습니다. 보이는 대로 믿었어요. 가까이 다가가 대화해 보고 알아보고 시간을 들인다는 것 알기엔 나이가 어렸어요. 아빠가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건 그만큼 시간을 들인다는 거야."

"평생 10시간 만 같이 놀았던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진정한 친구라면 100시간, 200시간을 같이 보내야 하지."


"아빠는 그런 친구가 있어?"

"글쎄. 예전엔 있었기도 했지."


운동장에는 강아지들도 더러 돌아다녔습니다. 당연히 돌아다니는 강아지들은 모두 목줄이 없었습니다. 개의 얼굴만 보아도 어느 집 개인지 알았어요. 돌아다니는 개들은 온갖 풍파를 받아 더러웠지만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쓸쓸한 녀석들은 돌아다니지 못하는 개들뿐입니다. 집안에 있는 개 털은 잘 다듬어져 있고, 살도 더 쪘지만 눈빛은 풀려나고 싶어 안달이었지요. 나와 친구들은 분명 나돌아 다니는 개들 쪽이었습니다.


더러 운동장 터줏대감 고양이들 그리고 때때로 다람쥐들까지 주변에 함께했지요. 자세히 관찰해 보면 고양이들처럼 편해 보이는 동물은 없었습니다. 햇볕이 나오면 운동장 돌 위에 올라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눈알만 굴렸어요.


"검정이 좀 봐봐. 꼭 개들 놀리는 것 같지 않냐?"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개들이 얼마나 우습겠냐."

"다람쥐들도 봐, 위로 아래로 다시 땅 주변으로 정신없다."


운동장을 감싸고 있던 은행나무들과 단풍나무 사이로 다람쥐들이 서로 쫓았습니다. 지난가을에 상수리나무 아래 숨겨 놓았던 도토리들을 잃어버렸나 봅니다. 고양이들은 그저 운동장을 내려보는 선생님들처럼 털을 핥고 있었어요.


"꼭 개들은 6학년 형들 같다."

"다람쥐는 1학년들 같아. 정신없어."


일요일 오후에 가장 정신없던 것은 우리들이지만, 그 나이엔 나 자신을 되돌아볼 줄 모릅니다. 남만 보이고, 보이는 대로 계속 믿고 상상했지요. 믿음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스며듭니다. 어떤 믿음들은 꼿꼿하게 날을 세워 상처를 내며 파고들기도 합니다. 한가로운 햇살 속 나무 아래 그늘에선 그런 꼿꼿한 날이 아뭅니다.


운동장을 한번 둘러보면 하나가 보이고, 다시 한번 둘러보면 안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세 번 돌면 나머진 흐릿해지고 숨겨진 보물이 보이기도 합니다.


운동장 가운데에서 정신없이 혼자 돌고 도는 놀이를 하며 나중에야 깨닫습니다. 그때 본 것은 내 삶의 가장 소중했던 시간 속 보물이었다는 걸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덩어리가 추억이 됩니다.


"아 취한다."

"돌고 돌면 취해."


상용이는 꼭 돌고 나면 취한다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취하는 걸 많이도 봤나 봅니다. 10살이 취하는 방법은 계속 도는 것입니다. 이미 취하는 방법을 알았던 10살이지요. 읽고 쓰는 것은 남들보다 느렸지만, 각종 놀이를 만들고 부르는 능력은 남달랐습니다.


"취하네. 이제 하루 하자."

"그래. 이제 해장해야지."


"해장이 뭐야?"

"어른들은 술을 마시고 나면 꼭 해장을 해."


"해장을 하루로 해?"

"바보야. 어른들은 술 마시고 국물을 먹어야 해. 그렇게 해장하는 거야."


이럴 땐 상용이가 전문가입니다. 어른들의 세상을 보는 건 상용이가 아주 빨랐거든요. 분명 상용이는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일요일마다 시간을 들여 우리는 나무를 다듬었습니다. 옆 마을로 가서 혼자 사는 할배 담벼락에서 뻗어 나온 큼지막한 가지를 잘라버렸지요.


'담을 넘어가서 괜찮다.'

'이미 가지 색깔이 죽어버려 잘라줘야 나무가 잘 자란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서로에게 들이대면서 말이지요. 눈을 피해 담벼락에 기대앉아 땅따먹기 하는 시늉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그럴듯한 야구 방망이를 만들어 냈습니다. 완벽한 방망이가 되려면 물도 뿌리고 햇볕에 말리고를 반복합니다. 왜 물을 뿌리고 반복했는지는 아무도 이유를 몰랐습니다. 머릿속에 그렇게 해야 방망이가 가벼워진다는 걸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방망이가 단단해질까?"

"원래 뿌리고 말리고 반복하면 단단해져."


"그걸 어떻게 알아?"

"야. 상용이 너 예전에 상철이 형한테 맞고 그럴 때 나한테 그랬잖아.

'자꾸 얻어맞으니깐 이젠 안 아프다고.' "

"맞아. 그랬지."


"그거랑 똑같아. 대신 방망이는 사람이 아니니깐 아픔도 못 느끼고 훨씬 단단해질 거야."

"그게 아니라 저 산 밑 동네 흙집처럼 처음에 진흙에 물을 묻혀서 벽에 붙이면 단단해지는 거랑 같아."


TV에서 보는 방망이처럼 잘록한 허리는 없습니다. 일자 모양에 꼭 사람 때릴 때 쓰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말리고를 반복했더니 훨씬 가벼워졌습니다. 공에 맞으면 그럴듯하게 날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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