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는 놀라며 옆에서 무릎을 꿇고 보살펴주었습니다. 어떤 보살핌인지는 기억이 나진 않지만, 10살짜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배려였을 겁니다. 어렸을 때는 한쪽 면만 볼 줄 알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착해 보였거든요. 그러다가 두 면을 보게 됩니다.
'착한 것과 나쁜 것'
'거친 것과 부드러운 것'
'친함과 어색함'.
거친 것과 부드러운 것은 양면성이 아닌, 한 곳에 겹쳐 있는 교집합 같은 것입니다. 부드러움이 있기에 거침이 도드라집니다. 윤기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대부분은 거칠지만 한 번씩 보여주는 진심스러운 행동들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아프면 내가 어떻게 해줄까?"
"아..니..야...으..으.."
그때였어요. 연무 오락실 문이 딸깍하고 열렸습니다. 문을 열면 유리창으로 된 문소리가 화답하듯 들렸어요. 주인 할머니가 소리를 듣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눈이 흐려진 건지 벌침에 겁이 나서 눈을 감은 건지 모릅니다. 저에게 다가오고 있는 할머니가 느껴졌습니다. 발소리가 더 가까워졌어요. 한 발자국은 크게 다른 한쪽은 약간 작으며 끌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어요.
할머니는 가까이 와서 무릎을 살포시 꿇었습니다. 저의 머리를 조심스레 들고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마를 손으로 쓸어주며, 저를 내려다보았죠. 동작이 자연스러웠습니다. 오래된 것처럼 말입니다.
'오래된 것은 자연스럽다.'
'자연스러운 것은 부드럽다.'
이런 비슷한 생각이 동동동 머릿속에 흘러갔어요.
윤기는 옆에서 벌에 쏘였다고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아주 살짝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할머닌 저와 오락실을 차례대로 가리켰죠. 오락실로 들어가야 한다는 손짓 같았어요. 윤기는 그 말 뜻을 알아듣고, 할머니의 반대편에서 저를 도왔습니다.
우리는 함께 오락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락실 안쪽 방문을 열고 저를 바닥에 눕게 했어요. 따뜻한 온기가 도는 방이었어요. 그저 따뜻했습니다. 오락실에서 보았을 땐 그저 차가운 공간이었지만 있어보니 햇살이 반짝였어요. 꼭 방안을 찾아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은색 빛이 도는 가위 같은 것으로 입안 벌침을 빼겠다고 시늉을 했어요. 벌침이 입천장에서 느껴졌고 그 주변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혓바닥으로 살살 문지르면 가시 같은 것이 달랑거리고 있었어요. 너무 세게 만지면 부러질 것 같아 차마 강하게 만지진 못했지만요. 차가운 금속의 입맛이 느껴지고 나서 벌침이 빠졌습니다.
할머니의 손이 보였습니다. 손은 아주 부드러워 보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보이던 할머니들의 주름도 보이지 않았고요. 손톱도 가지런했지요. 꼭 젊은 사람의 손 같았습니다. 손길은 따뜻했고, 온기가 전해졌습니다. 나를 도운 사람의 손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지도요.
저는 윤기와 할머니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겉과 속은 다르다. 사람의 마음엔 양면성이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나빠 보이는 사람만, 착해 보이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내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게 했다는 걸 몰랐습니다. 저 사람들이 그렇다고 판단했어요. 윤기와 할머니는 그저 하나의 사람일 뿐이었죠. 그걸 알기엔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렇게 누워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갔고, 준민이와 상용이도 걱정이 되었는지 오락실에 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대로 누워있고 윤기를 포함한 세 친구는 오락실로 가서 오락기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저를 한 번씩 보고, 오락실로 눈을 돌려 보고, 책장을 보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자기 방에 누가 누워 있으니 부끄러운가?'
통증이 가라앉자 언제까지 누워있어야 할지 감이 서지 않았습니다. 숫기 없던 저에게는 그런 결단력조차 없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가 누워 있으라고 했으니 그저 누워 있기만 했어요. '준민'이나 '상용'이라도 와서 이제 일어나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꼭 미용실에서 잘린 머리카락이 간지럽혀도 끝까지 참는 기분이었습니다.
'아 저놈들은 나한텐 관심도 없구먼.'
내 마음이라도 읽은 건지 할머니는 손짓으로 나보고 나가라고 했어요. 실눈을 뜨고 있는 절 본 거지요. 그렇게 오락실로 나왔습니다. 신발을 신고 나가려던 나에게 할머니가 한 손에 백 원을 쥐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므려 주기까지 했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빠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그런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거든요. 들킨 느낌이었습니다. 상용이가 동전을 줄 때 빼고는 한 번도 내 돈으로 오락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알았던 걸까요? 제 돈으로 오락을 해본 적이 없다는 걸요. 항상 친구들 뒤에서 서있던 저를 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그대로 친구들에게 가지 않고 한쪽 구석에 있는 오락기로 갔습니다. 거기엔 '보글보글'이 있었어요. 입으로 버블을 불어 악당을 물리쳤습니다. 나중에 '버블버블'이 정확한 이름이란 걸 알았습니다. 보글 보글이 풍선이 터질 때 잘 어울리는 이름 같아서 그렇게 불렀을 겁니다.
오락기에 나오는 산뜻한 음악을 타며 악당들을 이리저리 물리쳤어요. 저는 공룡처럼 생긴 주인공이 악당보다 더 악당처럼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뿔이 여러 개 등에 달린 건 분명 악당이야.'라고 생각했어요.
할머니가 쥐여준 동전 한 개는 세 번째 판에서 끝이 났습니다. 허무하게 죽어버렸죠.
"준기야. 너 벌 쏘인데 괜찮냐?"
"좀 아픈데 괜찮은 거 같아."
"말벌이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깐 꿀벌이어서 다행이지."
"다시 운동장으로 갈 수 있겠어?"
"아니. 집으로 가야겠어. 너네들은 좀 더 놀다가 와라."
"그래. 가서 잠 좀 자라. 내일 학교에서 봐."
오락실을 나오면서 힐끔 건넛방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할머니와 눈을 마주쳤어요. 얼른 눈길을 돌리고 후다닥 문을 열고 달렸습니다. 백 원을 받고 나서 전 할머니가 좋아졌습니다. 백 원에 모든 마음이 훌쩍 가버린 거지요. 백 원에 사람 마음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다니요.
집에 가는 길에 마음속에 명령하듯 주장했습니다. 제가 할머니가 좋아진 이유는 백원보다, 그전에 보여준 배려 때문이었다고요. 누군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었던 기억은 그때가 처음입니다.
"아빠. 오늘 입안에 벌에 쏘였어?"
"응? 어쩌다가?"
"자전거를 타다가 입안에 벌이 들어갔어."
"너도 칠칠치 못할 때가 있구나?"
아빠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습니다. 괜찮냐는 말도 없었지요. 저는 뾰로통해졌습니다.
"그래도 벌침은 빼야 할 텐데?"
"오락실 할머니가 빼줬어."
"그래? 감사하네."
"응. 말은 안 했지만 친절하셨어."
"나중에 오락실 가면 감사하다고 말씀드려."
감사하는 말을 못 했습니다. 백 원을 주셔도 고맙다고도 못했고요. 말을 못 하는 할머니인데 어떻게 말을 할지 고민이 되었어요.
"할머니가 말을 못 하니깐, 쑥스러운데."
"말을 못 하시는 게 아니라 조심스러운 거겠지."
"그냥. 오락실 바닥 한 번 쓸어드릴래."
"그래. 때론 말보다 행동이 나을 때가 있지."
아빠는 공장장답게 모든 건 움직여야 하고,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저 역시 말보단 행동으로 하는데 더 좋았습니다. 그때는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 되어보니 말이 행동보다 더 우대받는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