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 579권
감상
역사학자의 99%는 좌파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까이에서 살펴본 학자들이 왜 좌파에 경도되는
걸까요?
우리 해방정국에서 좌파는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우파는 진정한 보수 세력들이 차지하지 못했고요.
진정한 우파였던 김구는 암살되었고, 김규식은 밀려나 6.25 전쟁 중 납북되던 중 사망했습니다.
친일파와 친일 경찰은 혼란한 해방정국 속에서 보수 우익으로 옷을 갈아 입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뿌리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친일 경찰이 독립 운동가를 잡았던 것은 숙련된 직업의식이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빨갱이로 낙인찍혀 그 자손들은 북한에 있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은 가장 저평가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일본과도 대화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보이던 그는 암살로 사라집니다. 우가키 총독은 진정한 친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친일을 한 증거는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가장 문제적인 인물입니다. 국제적 정서를 잘 읽었고, 그것을 자신의 성공을 위해 과감하게 쓸 줄 알았습니다. 동시에 친일파와 손을 잡고, 반대파에 대한 테러로 자행하기도 했다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현재 김구가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할 때, 미군정 입장에서는 김구는 애초에 지도자로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미군정 시기 수 많은 기록을 남긴 버치 중위.
지금의 평가와 비슷하게 적확하게 인물들을 읽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상적인 인물이 권력을 잡게 두지 않습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엔 승리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자신의 입장에서 기록하지요.
현대사의 권위자라고 평가받는 박태균 교수의 저작이 지금의 정치 상황에도 울림을 줍니다.
이 책의 한 문장
일제강점기에도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일지언정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었건만, 대한민국 정부하에서는 수많은 '사법 살인'이 발생했다.
1
다른 하나는 한국인들의 성격이었다.
‘동양의 아일랜드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아일랜드 사람들과 너무 비슷하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고 유머 센스가 많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또한 주장이 많다. 공상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설화들이 있다.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파티와 휴가, 정치권력을 사랑한다. 질적 수준이 높으며 동시에 그러한 높은 수준으로 인해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매우 획일적이며 중국인과 다르며, 일본인도 아니다. 그들은 몽골로부터 내려왔으며,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를 받아들였고, 동양의 기준에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유지했다. (버치 문서 Box 5)
2
버치 문서에 있는 유일한 한국어 연설문이다. 제대로 말하기도 힘든 한국어로 조사를 읽어나간 버치는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과 그의 죽음에 대한 애통함을 표현한 것이다.
3
다른 미군정 관리이자 『주한미군사』의 저자였던 로빈슨 역시 그의 책 맨 앞 장에 다음과 같이 여운형에 대한 최고의 존경심을 표했다.
추모: 1947년 7월19일 한국의 서울에서 암살된 여운형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친다. 그는 미국의 분별없는 외교정책의 비극적인 희생자다. 인민의 대의를 옹호하던 위대한 진보적 민주주의자인 그는 좌익과 우익의 전체주의와 기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죽게 된 것이다.
4
미군정으로서는 이렇게 대중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여운형이 38선 이남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따라 소련군과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도 여운형은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남한의 지도자로 이승만과 김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여운형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5
우가키는 총독 재임 시절(1931~1936년) 여운형에게 많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는 총독 시절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여운형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우가키는 1945년 일본 패전 직후 전범으로 체포되었지만, 태평양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로서 이후에 곧 복권된 인물이다.
6
여운형은 일제강점기를 통해 무력으로 저항한 사례가 없었다. 스포츠를 통해, 그리고 언론을 통해 일본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는 스포츠와 언론을 통해 젊은이들을 불러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일본 총독부는 이러한 노선을 갖고 있는 여운형을 회유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의 눈에는 여운형이 암살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던 임시정부나 의열단과는 다른 인물로 비추어졌던 것이다. 사실 여운형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의열단의 지도자들과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7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에서 핍박받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총독부에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적과도 대화하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여운형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8
우가키나 고이소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여운형의 자질에 대해 20분 동안 얘기했으며, “심지어는 부통령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반드시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여운형이 미군과 협조할 것이라고 믿었다. 일본인들은 만약 미국이 진정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를 원한다면 여운형과 충분히 협조해야 하며, 그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9
버치 문서에 나타나는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는 어느 하나 긍정적인 부분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10
그런데 문제는 이승만이 ‘친일파’들의 참여에 대해서도 문호를 열었다는 점이었다. ‘친일파’는 일본에 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고 일본의 불의의 전쟁에 협력하면서 한국인들을 수탈하고 괴롭히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전쟁범죄자들이었기 때문에 새로 수립될 국가에 참여하면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11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서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문구가 있다.
이승만은 미국보다 더 앞서서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했던 인물이다.
이승만의 가까운 친구로서 그의 입장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했던 올리버(Robert T. Oliver) 교수의 평가다.
12
친일 경력으로 인해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었던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이승만을 대체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13
강용흘이 이승만과 김구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했지만, 김구는 친일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친일과 전범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김구는 친일 경찰의 청산을 비롯하여 철저하게 일제 잔재를 청소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따라서 김구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경찰과 공무원들의 우산이 될 수는 없었다.
14
(이승만은) 김구의 정치적 권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희망 섞인 말을 했고, 더 이상 잠재적 중요성을 갖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김구가 자유로운 시민으로 계속 남아 있는 사실에 대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이승만은 아직도 김구의 영향력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다. 이승만의 고귀한 지위에 위협이 되는 김구를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 실행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날짜와 제목 미상의, 김구의 법정 출석 직후 작성된 문서. 버치 문서 Box 4)
15
한국에서 미군정이 수립되었던 1945년 9월, 하지 사령관의 정치 담당 고 문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고무적인 사항은 해외에서 교육받은, 그러나 친일 의 오명이 있는 소수의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국무부 장관에게 보냈다.
16
경찰에게는 이승만밖에 없었다. 송진우도, 여운형도, 장덕수도 모두 암살 되었지만, 이들이 암살되기 이전부터 경찰의 희망은 이승만이었다. 1952년 과 1953년 유엔군 사령부가 부산에서 한국군을 동원한 쿠데타를 통해 이승만을 제거하고자하는 작전을 세울 때도 이승만은 이를 알고 있었다. 군 내에 도 이승만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없지 않았지만, 유엔군 사령관이 작전 통제 권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군을 100%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에 게도 믿을 수 있는 물리력은 경찰밖에 없었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는 기간동안 진정한 의미의 '경찰국가가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17
친일 경력의 경찰들은 이승만과 함께 김구를 그들의 경력을 은폐할 수 있는 지 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 때 각 지방의 경찰서에는 이승만과 김구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미군정청에서 지방 경찰서에 두 사람의 초상화를 붙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초상화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방 경찰서의 중앙 벽면에 붙어 있었다.
18
주목되는 점은 초등학교 교장이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1948년 여순사 건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 중 하나가 여수여자중학교 송욱 교장이 었다. 당시 지역 사회에서 학교 교장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지역 사회의 교장들은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자세를 갖고 있었던 것 같 다. 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자 했고, 이는 극우 세력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을 두둔하는 것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크다.
19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척 결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에 따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 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 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20
여운형이 조선체육회 회장을 역임하 면서 고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격려한 것.
21
무엇보다도 미군정을 골치 아프게 했던 사건들은 깡패들의 불법 적인 행동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서민들이나 소상인들을 괴롭히는깡패들 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해방정국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 제는 이들의 불법 활동이 정치와도 연결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버치의 문서에 정치인들 못지 않게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다. '장군의 아들' 김두한이었다.
22
김은 알카포네가 대중적 은혜를 베푸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비슷하게 여겨졌다. 그는 일본 경찰의 스파이였다. 그는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끼 자꽁무니를 뺐고, 공산주의를 희롱했다. 미국이 한반도의 남쪽 반을 점령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찾은 것처럼 그는 새로운 빛을 보았다.
23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열강들이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고한 것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 큰 충격이 되었고, 응당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거족적인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만약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헌장의 초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빠른 시 간내에 한국의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 어지고, 통합된 임시정부하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든 정치 세력들이 이에 협조했다면, 한반도 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955년 분할 점령과 신탁통치를 끝내고 독립 한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24
이렇게 반공의 선두에 섰던 이승만이 남북 지도자 회담에 참여하는 것을 고려하고 김구가 실제로 참여했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승만 의 주장이 단지 수사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의도를 내 비추었다는 것은, 당시 한국사회가 지도자들에게 원하는 것은 분단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통합을 위해 노력해달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25
이승만이 정권을 잡을 것이 분명하며, 미국의 문제는 단지 시작될 뿐이다. 미국은 한국에서 친기업적이고 상식이 통하는 정부를 만들고 싶어할 것이 다. 그러나 이승만은 절대로 그러한 정부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이 정권을 잡는다면 어려움은 최소화될 것이다.
26
해방정국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정치 구도 왜곡의 원형을 보여준다. 해방후 한국 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세력 간의 대립 구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 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 립 구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 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 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 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정치인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기득권 주류의 든든 한 후원자이자 스스로가 기득권자인 언론은 합리적인 정치인들을 빨갱이는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핑크'로 묘사했다. 아니면 철저하게 그들을 외면함으 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이도 저도 안 되 면 결국 테러라는 최악의 수단이 등장했다. 가장 합리적인 정치인이었던 김규식과 여운형이 정치에서 멀어져가는 과정은 한국 현대사의 어느 시대에나 비슷하게 나타났다. 미군정이 해체된 이후 김구가 암살되었다. 이승만을 가장 위협했던 조봉암은'사법살인'이라 는 테러를 당했다.
27
일제강점기에도 공산주의자들을 감옥에서 고문으로 죽일지언정 사형을 선고한 적이 없었건만, 대한민국 정부하에서는 수많은 '사법 살인'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