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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닮녀 Feb 14. 2024

나이 듦을 마주하는 사소한 순간들

그 속에 꽤 괜찮은 찰나를 누리며

에피소드 1. 

"오늘 저녁에는 뭐 먹을까?"

점심 첫 술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에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아무거나"

남이 차려 준 음식은 무엇이든 맛있고, 설거지를 요하지 않는 식사는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주부 14년 차다. 

"먹고 싶은 거 없어? 떡볶이? 치킨? 아니면 순대볶음 시켜 먹을까?"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줄줄이 들이대지만 여전히 무감각한 얼굴로 대답한다.

"당신 좋아하는 거 먹어. 난 상관없어."


어릴 적에는 먹고 싶은 것도 많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먹고 싶은 것도 없다. 옛 어른들이 나이 드니 입맛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다고 하던 말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늙어가는구나 싶다. 어쩔 때는 매 끼니를 챙기는 것 마저 번거롭고 귀찮다. 그래도 먹어야 사니까 하는 수 없이 먹는다. 늙어감과 입맛의 상관관계를 생각하며 살짝 서글퍼지려는 찰나, 남편의 한마디에 잠자고 있던 나의 미각이 깨어난다. 침이 꿀꺽. 혓바닥이 옴짝달쌀하는 모양새다. 


"맥주는 먹어야지?"


아! 맞다. 맥주는 먹어야지. 아직 입맛이 다 죽지는 않았다. 늙어가는 중이지만 여전히 젊음이 넘치는 침샘을 자극하는 녀석이 내게는 있다. 근데 뭐랑 먹지? 떡볶이? 치킨? 순대볶음?





에피소드 2.

"아핡핡핡핡핡핡핡"

"푸하하 하하하하하"

"으핫핫핫핫핫핫핫"

부엌에서 나 홀로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들려오는 가족들의 웃음소리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 아이들을 키우며 티브이는 멀리하게 되었고, OTT가 생활에 자리 잡으면서 예능프로그램을 즐겨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일요일이면 아이들이 예능프로그램을 본다고 티브이를 켜 놓곤 하는데, 가끔 숨이 넘어가라 웃곤 한다. 나도 한때는 가랑잎이 바람에 굴러가도 웃음을 터뜨리던 때가 있었는데, 재미있다는 일요 예능을 보아도 쉬이 웃음이 나오지 않는 꽤 무감각한 늙은이가 되어가는 듯하다. 


설거지를 마치고 앞치마를 걸어두고 거실로 나오는데 아이들과 남편은 여전히 너무 웃겨서 소리마저 나오지 않는 웃음보를 움켜쥐고 땅을 치고 있다. 

"엄마 핡핡핡 엄마도 봐봐 하하하 아악 학학학"

웃기다며 나에게도 같이 보자고 말하는 아들. 나는 하나도 웃기지 않아 라는 표정으로 티브이 앞에 섰는데 빵 터지고야 말았다.


"아학학학학학학학학학. 뭐야 저게. 파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에 무뎌져가는 중인가 했는데, 나 아직 젊은가?




에피소드 3.

"여보, 여기 나 흰머리 좀 빼줘."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던 신랑에게 족집게를 가져다 내민다. 이어폰을 꽂고 있던지라 머선 일인가 살피는 눈치다. 정수리를 들이밀며 한가운데 안테나처럼 서있는 흰머리를 뽑아달라고 했다. 남편의 코 앞에 바짝 들이밀었건만 계속해서 머리를 밀어낸다.

"왜 이렇게 머리를 밀어내? 내가 더러워? 나 머리 감았어. 검은 머리는 뽑으면 안 된단 말이야. 가까이 잘 보라고."

미간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남편이 말한다. 

"아니, 잠깐만 있어봐. 가까이 있는 게 잘 안 보여서 그래."


부인의 흰머리를 뽑아주는 노안을 가진 남편이라니. 왠지 모르게 웃기기도 하고,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하다. 불안한 손놀림에 나는 남편에게 다시 족집게를 받아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최대한 이마에 주름이 가지 않는 각도에서 신중한 손놀림을 구사한다. 드디어 흰머리만 뽑아냈다. 

"됐다"


흰머리가 나는 건 늙어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 같아 보고 있노라면 슬프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한 가닥을 스스로 뽑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직 노안은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럭저럭 다행이라 여기며 산다. 언젠가 노안도 찾아오겠지만 그땐 또 무언가가 위로가 되리라.





입맛이 없어서, 웃을 일이 없어서, 검은 머리가 없어져서 나이 듦을 느끼곤 한다. 그러다가도 아직은 입맛을 돋우는 맥주가 있어서, 가끔은 배 찢어지게 웃긴 장면이 있어서, 흰머리를 뽑아내도 될 만큼 검은 머리가 많이 남아있어서 여전히 삶은 괜찮다. 나이를 먹고 나이 듦은 마주하는 순간이 더 자주 찾아오겠지만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사소한 순간 속 괜찮은 찰나를 누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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