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산느 연주할 줄 알면 웅스 밴드에 당장 넣어주지
노니 장독 깬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꼭 나를 들어서하는 것 아닌가 싶다. 요즘 내가 깨고 있는 장독은 무엇일까?
나는 원래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신이 나고 의욕도 살아나며 자존감도 커진다. 그런데 요즘 내가 사무실에서 존재감이 영 시들하다. 승진 타이밍을 놓치니 사람들의 시선도 변했다.
'임팀장 서기관 달 때가 넘었지 싶은데 왜 아직 저러고 있지? 주무팀장도 못하고 있잖아'
'저번에 주무팀장으로 옮기려 했는데 해당 과장이 'No' 했다네'
'동기들은 줄줄이 서기관 됐던데, 저러다 젊은 사무관들한테 밀리겠네'
'이제 한물간 것 같아.' 등등
뼈 때리는 말들이지만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올해 나이가 벌써 56세다(그러나 2023.6.28.부터 시행되고 있는 행정기본법과 민법에 따르면 내 법적나이는 54세이다. 윤석렬 대통령이 나이를 만 나이로 통일하면서 내 나이가 몇 살인지 헷갈린다. 그러나 관습이라는 것이 얼마나 바꾸기 어려운 것이냐. 내가 54세라고 하면 어떤 사람은 나를 1972년생으로 알지도 모른다. 헷갈리지 않게 나이를 없애버려?). 젊은 사무관들이 불쑥 치고 올라오는 것을 보면 이제 나는 그들에게 열심히 일할 기회를 주고 방구석으로 물러나는 것이 어른으로써의 도리일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서기관으로 승진해 과장자리에 가서 대구시 정책의 한 분야 책임자가 된다고 한들 기운 다 빠져서 얼마나 열심히 일할 수 있겠는가 싶다. 시민들이 더 살기 좋은 대구를 만들려면 나 같은 노땅은 물러나는 것이 그나마 체면을 지키는 길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절반을 보낸 중년이 되면 사람들이 둘로 나뉜다.
나이탓하면 하고 싶은 거 참으면서, 또는 시도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여전히 제 나이 몇인 줄 모르고 스무 살, 서른 살 청년 어쩌면 청소년으로 사는 어른아이들도 있다. 어른 아이들은 또 둘로 나뉘는데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채 사고 치는 나잇값 못하는 어른아이가 있는가 하면, 정신적으로 성숙하여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산다는 것이 생각만큼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성숙한 아이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오십 이후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면 정말 기쁜지를 알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도전해 왔다.
'공무원 라나언니'라는 제목의 에세이 책도 내고, 보디빌딩 대회에서 1, 2등도 하고, 브런치 스토리 작가로 활동하며 글도 꾸준히 쓰고 있다. 한국코칭협회에서 코칭 자격증도 따고 아주대 이성엽 교수님을 통해 NLP(Neuro Linguistic Programming)도 배우면서 마음공부도 하고 있다. 특히나, 올해는 리처드 러드의 유전자키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를 찾는 여행을 3월부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그동안 찾아 헤매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를 기대하고 있다.
나를 찾는 여행은 음악으로도 흘러갔는데 어릴 때 일직이 피아노를 배웠고 걸스카웃에서 베이스리코더를 불며 행진한 경험이 있다 보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항상 노래를 흥얼대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는 대구재즈싱어즈에서 알토로 노래한 적도 있었다. 또한 락발라드를 좋아했는데 남자들이라면 한 번씩 노래방에서 불렀다는 블랙홀의 '깊은 밤의 서정곡'을 노래방에서 목에 핏줄을 세워가며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러다가 블랙홀 공연을 보기 위해 부천, 광주, 서울 등으로 가기도 했다.
그중 부천에서 열린 콘서트에 갔을 때이다. 그들은 지방 공연을 가면 항상 지역밴드를 게스트로 초대해서 공연하게 했는데 그날 무대에서 폭발적인 연주를 하던 드러머를 보았다. 여성분인데 연주도 연주이지만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임직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그녀가 무대밖으로 나오자 어린아이가 "할머니!" 하고 쫓아 가는 것이 아닌가. 그녀를 어린아이를 안아 올렸고 그제서 보였다. 그녀는 손주를 둔 할머니 드러머였다.
무대 위에서 드럼을 치는 할머니 드러머의 모습은 적잖이 신선했다. 그리고 나에게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나도 저렇게 멋진 드러머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항상 나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를 찾고 있지 않았는가. 그렇게 나는 2024년 6월, 드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의욕이 왕성하던 초반에는 블랙홀의 쉬운 곡들부터 연습했다. 4박자 정박인 '내 품으로'로 시작해 갑자기 난이도가 상승했던 '물 좀 주소'를 거쳐, 'Rain'과 'Item'까지. 그러던 어느 날 음악 듣고 싶을 때 종종 가던 나발 어쿠스틱 바에서 갔다. 그 라이브바는 음악을 좋아하는 4명의 공동대표로 운영이 되고 있고 그중 3명이 웅스밴드를 만들어서 김천에서 얼마 전 첫 공연을 한 바 있었다.
구성된 지 일 년도 안된 웅스밴드는 베이스와 서브 보컬 1명, 기타와 메인 보컬 1명, 그리고 피아노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드러머가 없다. 내가 드럼 배우고 있다고 한 것을 기억했는지 나를 보자마자 드럼연습 잘하고 있는지 묻는다.
"드럼 연습 잘하고 있어요?"
"열심히 하고 있죠. 얼마 안 되었지만 이제 슬슬 밴드도 들어가 보고 싶네. 웅스 밴드 드러머 자리 비었잖아? 나 1년만 더 연습하면 받아줄 거야?"
친구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토토 음악 연주할 줄 알면 당장 넣어주지!"
"진짜? 약속했어!"
"그럼! 록산나를 치는 드러머를 거부할 순 없지!"
그런데 문제는... 토토(TOTO)가 누구냐는 거다.
애플 뮤직으로 먼저 찾아서 음악을 들었다. 요즘 음악처럼 화려하거나 기계적이지 않고 다소 올드한 느낌이 났다. 유튜브에서 아프리카를 연주하는 드러머를 찾아보니 드럼 세팅부터 남달랐다. 심벌도 여러 개 추가되어 있었고 그중 크기와 모양이 우주선 같은 것도 있었다. 드럼도 스네어를 포함해서 네 개가 아닌 여러 개가 덧붙여져 있었다.
이처럼 복잡한 드럼 세트를 앞에 두고 손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어마어마한 연주를 드러머가 누구인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제프 포카로(Jeff Porcaro)로 드럼의 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의 곡을 연주해 오라고 한 나발 대표가 떠올라 기가 찾지만 그래도 가장 쉬운 것을 골라서 연주하면 되지 않겠나 싶어서 드럼 선생한테 물었다
"토토 노래 연주할 줄 알면 웅스밴드에서 받아준다고 하는데 초보가 칠 만한 곡이 있나요?"
선생이 웃더니 말했다.
"하하, 아프리카 하시죠"
"아프리카? 그 곡은 초보가 칠만 한가요?"
"함께 한번 산을 넘어가 보죠"
그렇게 드럼 배운 지 5개월 된 사람이 토토(TOTO)의 아프리카를 연습하게 되었다.
'Africa'는 듣기엔 부드러운데, 연주해 보니 초보인 나에게는 악마 같은 난이도였다. 독특하고 중독성 있는 멜로디에 록의 강렬함과 R&B의 그루브를 잘 조합해 독특한 리듬감을 부여한 노래는 엄청난 빠르기에 스틱은 어느 정도 친다고 해도 킥 드럼이 전혀 따라가지를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친다고 한 그 'Africa' 드럼 패턴은 그냥 평범한 비트가 아니라 드러머 사이에서도 힘들다고 잘 알여진 '하프타임 셔플'이었다. 초보가 이걸 하겠다고 하니 진도가 나갈 턱이 있나. 한 달 반을 같은 곡을 연습하면서도 완주는커녕 연주에 발전이 없자 드럼선생도 지겨운 모양이다. 나 또한 진도가 안 나가니까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은 선생이 제안했다.
"다른 곡으로 넘어갈까요?
결국은 아프리카를 완주하지 못하면서 웅스밴드에 넣어달라는 말도 아직 하지 못했다. 그리고 휴직 중에는 연습하기가 좋았는데 지난해 9월 직장으로 복귀 후에는 연습 시간을 빼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자꾸 수업을 빼먹게 된다. 수업을 빼먹으니 재미도 떨어진다. 드럼을 통해서 재밌는 노년기를 보내려고 한 내 꿈이 이렇게 멀어져 가는 건가?
뭔가 정신을 다잡아야 할 계기가 필요한 그때, 드럼 선생이 단톡방에 공지를 올렸다. 하반기 합주회를 열 예정인데 참여하고 싶은 사람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역시 뭐를 하든지 목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집중하게 되고 방향성을 가지고 노력하게 된다. 선착순 5명이라는 말에 얼른 선생한테 문자를 보냈다.
"선생님, 12월 공연에 저두 신청하고 싶어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면서 무대 두려움도 극복하고 또 열심히 연습할 이유도 찾고요"
"오~ 좋습니다! 같이 수업하면서 곡 정해보아요"
선택한 곡은 드럼 도입부가 멋진 신해철의 '그대에게'이다. 팔다리가 긴 나에게는 화려한 움직임으로 드럼을 폭넓게 연주하는 곡이 어울릴 것 같았다. 드럼 선생도 "연습만 잘하면 아주 멋질 것 같아요" 라며 만족해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노는 김에 장독 깬다'는 말처럼 그냥 드럼이 좋아서, 치니까 재미있어서 하게 되었는데 연말에 무대에 서게 되었다. 공연인 만큼 의상과 메이크업까지 신경 써야 해서 다시 피가 끓는다.
최근 드럼 관련 검색을 많이 했더니 알고리즘이 Emil Vergo라는 연주자를 보여준다. 그는 드럼에 물을 붓고, 형광색 스틱을 돌리고 던지고, 심지어 어떤 곡에서는 스틱에 불을 붙여서 연주를 한다. 연주하면서 자신의 끼를 모두 발산하는 것을 보면서 이거야! 하는 느낌이 왔다. 그렇게 그의 모습에서 미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아직 갈길이 멀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면 그 꿈은 이루어진다. 그 꿈은 나이를 초월한 멋진 드러머 라나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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