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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4. 2023
김동기 셰프의 한그릇[여천 식당]
백반 정식
용산과 여천식당
고층건물들 사이에 오래된 듯한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골목길이 보인다. 용산역에서 10분 정도를 걸어가면 ‘땡땡땡’ 열차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이촌로 29길 바로 용산 땡땡거리다. 지금은 오래된 골목길의 추억 속 여운 속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의 방문이 잦아져 브런치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많이 들어서고 있지만 골목 사이사이를 걷다 보면 마치 내 어린시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1980년대 느낌의 음식점, 방앗간, 사진관 들이 아직 영업을 하고 있다. 기찻길 옆 주점은 저녁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 기찻길이 보이는 창문에 앉아 땡땡 소리를 들으며 먹는 안주와 술은 그 어느 음악보다도 술자리의 분위기를 띄어주며 술잔을 기울이게 해준다.
몇 년 전 용산에서 브런치 카페를 오픈해 줄 때다. 운이 좋았는지 실력이 좋았는지 모르지만 오픈해 준 카페가 장사가 잘 되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라 잠깐 쉬는 시간에 뛰어가 밥을 먹던 곳이 있는데 허기를 때우기보다는 한숨 돌리고 싶었던 곳이 바로 여천식당이다. 이곳은 백반 집으로 매일매일 반찬과 주재료가 바뀐다. 어떤 날은 제육볶음, 다음날은 뼈다귀김치찜, 생선조림 등 정갈한 메뉴들이 밥상 위에 올라온다.
여천식당은 문을 연 지 40여년 된 노포다. 분식집으로 시작해 중간에 주류를 파는 주점도 운영을 하다가 지금의 백반집으로는 20여년이 다 되어 간다고 한다. 음식 솜씨가 좋은 사장님에게 밥집을 하라고 주변에서 하도 성화를 부렸다고 하는데, 그분들의 마음을 식당에 앉아 밥을 먹고 있자면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여천식당은 낮은 1층짜리 건물에 위치해 있다. 문이 낮아 들어갈 때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느낌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할머니 집에 들어가는 느낌이라 정겨움이 가득하다. 날씨 좋은 날은 주변에 높은 건물들이 없어서인지 따뜻한 햇살이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오는데 안쪽에서 들리는 TV 소리를 들으며 채광 속에서 먹는 백반은 그 자체로도 힐링이 된다. 식당의 한쪽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 있는 좌식 테이블이 있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벽걸이 에어컨이 있는데 가동이 될까 궁금하다. 여천식당처럼 오래되고 장사가 잘되는 노포의 특징이 있다. 낡았지만 깨끗하다. 허름함이 지저분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는 따뜻한 곳이다.
여천식당의 백반
늦은 점심,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아 백반 한 상을 시킨다. 따로 다른 메뉴는 없다. 곧 정갈하게 차려진 반상이 나온다. 세월이 느껴지는 은색 쟁반이다. 다른 음식들보다 눈에 띄는 건 포실포실하게 갓 지은 듯한 고봉밥이다. 요즘엔 어느 식당을 가도 이렇게 푸짐하게 얹어진 밥을 보기 어렵다. 오전 내내 일하고 온 허기진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 가득한 밥그릇이다.
여천식당의 반찬은 매일 달라진다. 연속으로 4일 정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김치 말고는 반찬이 같은 적이 없다. 여천식당의 주방은 문이 없어 카운터 선반을 제치고 나와야 한다. 그래서 단골들은 식사를 한 후 계산을 하며 다 먹은 반상을 주방으로 가져다준다. 나도 단골인 척 슬그머니 주방에 다 먹은 반상을 놓는데, 밥이 너무 많아 조금 남겼을 때면 꼭 한마디를 하고 간다. “너무 맛있는데 제가 위가 작아요”라고. 사장님 마음 안 상하게 말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여천식당의 메뉴는 제육볶음. 슴슴하고 자극적이지 않지만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끔 고기 누린내를 잡기 위해 맵고 짜고 단 양념을 하는 곳들도 있는데 그런 곳은 꼭 배탈이 나기 마련이다. 매콤달달한 향연에 입은 잠깐 즐거울 순 있지만 분명 속은 상하고 있다. 슴슴함은 쌈장으로 맛을 더할 수 있다. 아삭거리는 상추에 제육고기, 마늘, 쌈장을 올려 입에 한입 넣으면 체면이고 뭐고 없다. 입안 가득 씹고 있지만 손은 다음 쌈을 준비하고 있다. 술을 팔지 않는 여천식당 사장님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술을 팔았다면 이곳은 주당들의 성지가 되었을 거다. 피곤하실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