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 전에 고백부터 하나 하자면,
8월, 비가 한창 올 때 침대에 납작하게 붙어서 쓴 한 단락을 어떻게든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 단락을 잡고 위로 아래로 늘리며 확장시키다가 또 지우며 수축시키다가를 반복했다. 그런데 축축한 시절이 건조한 시절로 탈바꿈하는 바람에 시의적절하지 못한 메모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이번 달 글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아무거나 써볼 작정이다. 더욱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곡식 님이 추천한 노래를 틀어놓고 하얀 노트를 활자로 채워나가려고 한다.
한 번만 더 고백하자면 원래는 노래를 틀자마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침대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 노래를 틀고 우선 누웠다. 창밖을 한참 보다가 이참에 잠시 저녁잠을 자볼까 하다가 비의 It's raining이 들려오자 왠지 움직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식탁에 앉아 블루투스 키보드 위에 핸드폰을 꽂고 에버노트를 켰다.
지금은 에픽하이의 Let it rain이 들려오고 있고, 나는 한영 키(Fn+alt)를 누른다는 걸 alt만 누르는 바람에 구글 보이스를 깨우고 말았다. 구글 보이스가 "다음과 같이 말해 보세요 - 쓰레기 버리라고 알려줘"라고 유혹해서 멍하니 "쓰레기 버리라고 알려줘"라고 말해버렸고, 구글은 "언제 알려드리면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걸 알면 내가 안 물어보고 버리지 않았을까? 설령 알려줘도 내가 버리려고 움직이지 않는 한 쓰레기는 방 한쪽에 그대로 엉덩이를 눌러 박고 있을 것이다.
에픽하이의 노래가 끝나간다. 아쉬워서 뒤로가기를 눌러 재생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와 중학교 때 - 그러니까 한창 자유롭게 흑화할 수 있을 때 - 이 앨범을 참 좋아했는데. 그때 들고 다니던 아이리버 MP3는 몇 곡만 넣으면 바로 헥헥대며 다른 노래를 뱉어내라고, 제발 주인님아 욕심을 좀 비우라고 툴툴거렸다. 모든 내 세대가 그 당시에 보유한 음악플레이어가 그랬듯이 말이다. 자연히 MP3에는 엄선된 곡/앨범만 발을 들일 수 있었고 그중 하나가 에픽하이 Swan Song이었는데. 오랜만에 한달글 덕분에 이 노래를 듣는다.
지금은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이 방을 가득 채웠다. 그 사이 옆에 영귤차 티백을 담근 유리컵은 차가 다 녹아 투명한 귤색으로 변했다. 차가운 물을 잘 마시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에 티백을 담그면 아주 느리고 천천히 티백으로부터 찻물이 뱀처럼 스며나와 또아리를 틀며 투명한 유리를 물들이는 모습을 좋아한다. 조명을 맞댄 유리컵 뒤에 드리워진 투명한 그림자를 좋아한다. 컵을 움직일 때 티백이 흔들리면서 그림자가 함께 흔들리는 모습도 좋다. 어두움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렇게 투명하고 연약한 어두움은 사랑할 수 있다.
지금은 이적의 Rain. 오늘은 퇴근할 때 따릉이를 탔다. 마포로 이사를 하고 처음 출근하는 날 회사까지 가는 길을 지도로 켜니 지하철은 24분 걸리는데 자전거로는 17분 걸린다기에 한 번쯤 시도할 법하다고 생각했는데 저번 주는 외근 및 야근으로 시행하지 못했다. 출근길보다는 퇴근길이 낫지 않겠는가. 마침 오늘이 이번 주 처음으로 저녁 6시 반에 칼퇴(매우 부적절한 단어다. 원래 노동자는 이 시간에 퇴근하는 게 맞다.)한 덕분에 회사 앞에서 따릉이를 쥐고 한강을 왼편에 두고 서쪽으로, 노을을 바라보며 달렸다.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무수히 많고 또 내가 그 모든 단어를 알아서 내가 본 하늘과 강의 빛깔을 적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부족한 어휘력과 문장이 아쉽다. 그래도 시도를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
군청색과 회색빛을 띤 무거운 구름이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구름 사이로 해가 주황색 꼬리만 남겨두고 저 멀리 걸어갔다. 해의 꼬리 주변의 구름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깊고 넓은 강의 물결이 넘실대고 서로 부딪히며 남은 하루의 빛을 서로 나눠 가지려고 싸우는 사이에 햇빛은 가루처럼 물 사이로 부서져 내렸다. 강 너머 여의도의 빌딩숲이 철옹성처럼 까맣고 하얗고 빨갛게(최근에 건물 하나가 새로 지어지면서 추가된 색이다. 한국의 단청을 표현했다나, 그런데 내 눈에는 그냥 선물 포장용 리본을 건물에 휘휘 두른 것 같다.) 빛나고 조금 더 멀리에는 국회의사당이 벗어진 머리를 드러내고 엄숙하게 서 있다. 따릉이는 속도를 내는 데 한계가 있어 주위를 보면서 달릴 수 있어서 좋다. 기어에도 한계가 있어 페달을 오른발 왼발 번갈아 정성껏 밟아야 하는 것도 좋다. 요즘은 움직이는 데 정성을 들이는 시간이 얼마 없어서 귀하다. 머리 위로 한강철교와 마포대교를 지나 보내고 마포역 근처에 따릉이를 반납했다.
고작 30분 페달을 밟다가 땅에 발을 디딘 다리의 감각이 낯설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뒤로 밀려나야 할 것 같은데 보도블록은 당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 것 같다. 당연히 움직여야 할 것 같은 대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는 이질감. 한 다리 한 다리를 의식적으로 옮겨 집으로 향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건물의 실평수 8평의 오피스텔에 산 지 이제 약 열흘이 되었다. 집이 서울인데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는 경우는 아주 흔한 편은 아니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정말 내 공간이, 침묵이 필요했다. 동생 하나는 이미 직장 근처에 살고 동생 하나는 기숙사에서 왔다갔다 하므로 집에 사람이 항상 북적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적이지 않는다는 게 침묵의 동의어는 아니다. 그리고 지금 독립하지 않으면 3X살에 결혼(하게 된다면...)할 때나 부모님 품을 떠나게 될 텐데, 가족의 품을 떠나 다른 가족의 품으로 직진하는 건 너무 숨 막히는 코스다. 그리고 내심 엄마도 슬슬 공간이 좀 더 필요한 것 같았다. 부모님 마음이 안 그렇다고 하기엔 엄마는 내가 집을 비운 날 바로 내 방을 막내 방으로 바꾸고 막내 방은 게스트룸으로 바꾸더니, 빈 공간에는 뭘 놓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주 무던하고 모던한 가족이라고 스스로 자부한다.
혼자 살며 내가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꽤 소소한 재미다. 예를 들어서 나는 생각보다 청소를 좋아한다. 집에 있을 때는 나보다 청소를 더 좋아하는 아부지가 오전 열한 시에는 마루를 닦고 오후 세 시면 청소기를 돌려서 이걸 알 기회가 없었다. 내 공간이라는 주인의식이 없기도 했고. 이곳에서 나는 출근 전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틈틈이 먼지를 닦는다. 먼지나 얼룩이나 머리카락이 눈에 띄거나 발에 밟히는 것도,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 있는 모습도 잘 참지 못한다. 이건 그냥 성격이 더러워서 인내력이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또 나는 생각보다 요리를 좋아한다. 집에서는 항상 냉장고 또는 냄비 또는 팬이 음식으로 채워져 있어서 몰랐다. 나는 내 집에서 혼자 아침 또는 저녁을 휘뚜루마뚜루 만들어 그릇에 정갈하게 담아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거창한 요리 말고, 스크램블이나 파스타나 계란이랑 간장에 볶은 양파만 올린 덮밥이나 두부구이 같은, 간이 세지 않은 한 그릇 식사가 주 메뉴다.
오늘은 반모짜리 찌개용 두부 속을 집들이 선물로 받은 트러플바질페스토로 채우고 기름 두른 팬에 구웠다. 육면체의 모든 면을 구운 후에 모짜렐라 치즈를 녹여 두부 위에 올렸다. 두부 옆에는 올리브유에 무친 샐러드용 어린잎 한가득. 그 위에 소금이랑 후추랑 파슬리를 뿌려 먹었다.
자취 10일 차 꼬맹이가 하는 말이라 청소와 요리 얘기는 누군가에게는 소꿉장난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한 자취 180일쯤 되면 여전히 위 사항이 유효한지 검증하는 글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플레이리스트를 두 번째 돌리고 있다. 지금은 Travis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멜로디와 가사의 유착관계는 실로 무서워서 저 문장을 볼 때마다 멜로디가 자동 재생된다. 이제 스크롤을 해도 될 정도로 백지를 채웠는데. 한두 문단만 더 써볼까.
낡고 작은 집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창 너머에 있다. 침대에 걸터앉으면 남서쪽에 한강과 그 위로 크리스마스 전구처럼 반짝이며 달리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오피스텔 건물 앞문으로 나가면 마포대교를 통해 한강으로 갈 수 있고, 뒷문으로 나가면 200m 거리에 한강공원마포나들목 출입로를 통해 한강으로 갈 수 있다. 고로 나는 이 글을 이제 놔주고 맞춤법 검사기를 한 번 돌리고 마무리할 작정이다. 오늘 하루가 더 흐르기 전에 한강변을 슬렁슬렁 걷고 와서 단잠을 청해야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마침 밤이길 바라며, 좋은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