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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Mar 29. 2021

[장문장] 퇴사하고 제주도로 떠납니다.

라는 제목의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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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제목을 써보고 싶었다. 담담한 듯 안정적인 듯 -합니다 와 마침표를 가지런히 붙이는 '퇴사'와 '여행'이 들어간 제목 말이다. 돈 많은 백수가 혼자 여행을 하게 되었으니, 단련된 족저근막만큼 탄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마을 끝의 뮬

제주 공항에 내리고 차를 빌려서 대충 고기국수를 먹고 첫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을 하니 8시였다. 제주도에는 두 가지 결이 있다. 제주시는 마산을 닮았다. 자동차들이 깜빡이를 안 키고 끼어드는 것이나, 길빵을 하는 사람들, 너무 많은 유흥업소와 인터넷 도박 PC방이 그렇다. 반대로 관광지는 서울의 스탠다드를 따른다. 게스트하우스는 깔끔하고, 서비스는 잘 갖추어져 있으며, 카페나 식당 모두 청결하고 멋스럽다. 이 두 가지 결이 구역별로 정확하게 구분되어 있으니 신기한 노릇이다.

체크인을 하고 잠시 누워있다가, '이대로 있을 수 없어!' 라며 샤워를 하고 방을 나왔다. 찬 바람을 헤치며 바다를 향해서 걸었다. 해안 끝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을 찾았고, 뮬이라는 칵테일을 마셨다. 유자와 보드카가 들어갔다. 상큼하다. 할 게 없으니 책을 읽는다. 잡생각이 사라진다.

대신 아주 현재적인 잡생각이 든다. 늦은 밤 제주도 육지 끝 까페에서 유자 뮬 한 잔과 책을 읽고 있는 자신을 계속해서 그린다. 따라서 책에 온전히 집중하기는 어렵다.


고양이

제주도에는 고양이들이 많다. 해안마을의 특징인데, 어업 부산물이 많이 나와서 그런 모양이다. 길고양이 밥을 준비해두는 게스트하우스도 많고, 감녕 미로마을은 정말 고양이 천국이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박해하지 않고, 관광객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터라 고양이들이 겁도 없는 편이다. 만져도 가만히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누나 집에 맡겨놓은 나의 러시안블루 장문장을 생각하며 고양이들에게 미리 준비해둔 츄르를 주기도 했다. 바람피우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쾌락이 더 컸다.


게스트하우스의 사람들

혼자 여행하는 건 처음이었고, 게스트하우스는 처음이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잔 두 번의 밤 동안 나는 막걸리를 사 들고 공용공간으로 올라갔다.

말하는 인간은 세 가지 레벨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를 빌리자면 낙타, 사자, 아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낙타는 말이 많고, 잘 듣지를 않는다. 두 게스트하우스 모두 낙타가 있었다. 외롭고,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자였다. 사자는 말을 많 않고, 듣기만 한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초면에 지위를 지키는 법을 알지만, 이런 인간과 즐거운 대화를 하기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아이가 있다. 두 번째 게스트하우스에서 아이를 만났다. SAP 출신의 2X연차 컨설턴트 분이었다. 말을 많이 하면서 허튼소리도 잘 들어준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고, 초면이자 지나칠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사람은 진심이 충분히 많아서 나에게도 집중한다. 낙타는 울고, 사자는 침묵하고, 아이는 사자의 등에 올라타기도 하고 낙타의 등에 올라타기도 한다.

마지막 날에는 제주도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났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게스트하우스 가격에 따라서 그 날 만나는 사람이 바뀐다. 어떤 높은 가격이, 혹은 낮은 퀄리티가 받아들인만한가는 사람을 잘 구분해준다. 과연. 내가 아이를 만난 곳도 욕조가 딸린 멋진 게스트하우스였다.


막걸리

성인이 된 이후로 나의 음주력은 소주와 맥주로 시작했다가, 와인으로 갔다가, 막걸리로 도착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막걸리는 경주법주 손막걸리인데, 아직 아는 사람이 많이 없다. 단 맛을 싫어하는 내게 알맞다. 그래도 여전히 새로운 막걸리가 보이면 꼭 하나 사보는 편이다.

우리나라에는 로컬 도가가 많은데 규모가 크지는 않다. 따라서 대부분 로컬 막걸리는 로컬의 응원 속에 로컬에서만 소비된다. 즉 지방에 내려갈 일이 생기면 꼭 그 동네 막걸리를 마셔봐야 한다. 제주도 막걸리는 세 가지 카테고리가 있는데, 가장 플레인 한 쌀막걸리, 귤향이 들어간 막걸리, 그리고 우도 땅콩이 들어간 막걸리다.

나는 그중에서 쌀 막걸리와 땅콩 막걸리를 먹었는데, 달지 않고 상쾌한 맛이었다. 쌀 막걸리는 가볍고, 땅콩 막걸리는 묵직하다. 특히 쌀 막걸리를 흡족하게 먹어서, 돌아와서도 구할 수 있다면 마시고 싶다. 제주도 하나로마트에서 파는 쌀 막걸리는 뚜껑이 녹색인데, 국내산 쌀로 만들었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파는 것은 흰 뚜껑인데, 나는 편의점에서 사 먹어서 국내산의 맛을 모른다. 미묘하게 다르다고 하는데, 다음에는 꼭 하나로마트에서 사야겠다.


바다의 질감과 서핑과 스노보드

하늘에서 바다를 보면 무척이나 단단해 보인다. 파란 유화 같다. 바다의 표면은 건조한 듯 결이 나 있고, 손바닥으로 너무 빨리 닦아내면 베일 것만 같다. 미동도 없는 바다를 가끔 종이조각 같은 배가 지나간다. 유화 같은 바다의 질감을 방에 가져다 두고 싶다.

제주도의 바다는 4면이 다 다르다. 아마 조류를 어떻게 맞이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진 것일 테다. TV에서만 봤던 어느 외국의 깨끗한 바다 같은 제주도의 바다를 보고 있자니 작년에 스페인에 함께 간 친구가 생각났다. 그 친구는 제주도 출신인데, 프랑스의 바다를 보고 무척이나 질려했다. 제주도만 못하다며. 과연 맞는 말이었다. 너무 맑고 파란 바다를 보면 갈라진 마음이 녹아내렸다가 평평하고 단단하게 굳는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살면 행복할 것 같다.

바다를 볼 때마다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견뎠다. 뛰어들기에는 너무 추웠고, 지금 시국에 추위를 견디기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2일 차에 한 서핑으로 그런 마음을 풀었다. 웻 슈트라는 이름의 쫄쫄이를 입고 해변을 거니니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었다.

서핑을 처음 배울 때는 강사님이 파도를 보고 뒤에서 밀어주는데, 프리 서핑 시간에는 혼자 파도를 잡아야 한다. 뒤에서 밀어줄 때는 잘도 일어서서 꽤나 탔는데,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어서 그냥 보드 위에 앉아서 중심잡기 놀이를 했다. 한 분은 강사님이 밀어줄 때도 도저히 일어나지를 못해서 결국 울었다. 울먹이면서 나보고 "처음 하시는데 잘 일어나시네요"라고 하길래 내가 위로를 하려고 "저는 스노보드를 좀 탔어요"라고 말했더니, 본인도 스노보드를 탔다고 한다. 스노보드는 어떻게 탄 거지. 위로에 실패해서 그 뒤로 대화하지 않았다. 포기가 이렇게 쉽다.

다음 날 카페에서 바다를 보는데 누군가 카이트서핑을 하느라 낑낑대며 바닷바람과 싸우고 있었다. 해양스포츠는 날씨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고, 피부도 잔뜩 탄다. 다음에는 잠수하는 쪽으로 해봐야겠다.


혼자되기

인간에게는 페르소나가 있다. 보통 가면으로 상징되는 페르소나에는 가짜라는 뉘앙스가 있지만, 사실 페르소나는 유학에서 말하는 관계론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부모를 대할 때, 친구를 대할 때, 관계마다 인간은 달라지고, 본질이라고 하는 어떤 순수한 자아는 사실 없다. 혼자 있을 때조차 스스로를 대하는 페르소나를 따른다. 이는 본질을 추구하는 서양의 고대 철학과 확연히 다른 부분이다.

낯선 곳을 혼자 다니다 보면 점차 스스로를 대하는 페르소나를 인식하게 된다. 2일 차가 되어서야 나는 셀카봉을 꺼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카메라 안의 나를 마주하는 게 참 어색했다.

점심으로 고등어회 초밥을 먹고 성산일출봉으로 출발했다. 코로나로 입장 제한이 걸려, 10분 뒤에 1200명 정원이 다 찬다길래 바쁘게 달렸는데, 가까스로 1199번째 표를 얻을 수 있었다. 시간은 오후 1시가 안 됐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가다 보니 내 뒤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덕분에 카메라를 세워두고 사진을 양껏 찍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다 보니 점점 표정이 자연스러워졌다. 옛날에 지었던 표정이었다. 점잖빼지 않고 원숭이처럼 뛰어다니던 시절. 그 뒤로는 어디서나 카메라를 꺼내 나를 찍었다.

다른 날에는 오름을 올랐다. 늦어서 못 라 간 한라산의 대안이었는데, 새삼 내 걸음이 빨랐다. 사람들을 다 지나치고, 땀에 젖어서 오름 정상에 올랐다. 혼자서는 완급을 조절할 수 있기도, 없기도 하다. 쉬고 싶을 때 쉬고,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다지만, 때로는 내 속도가 너무 빠르다. 내가 얼마나 빠른지, 내 위에 올라탄 나는 깨닫기 힘들다.


세작과 자본력

이른 아침에 나왔더니 신창 풍차 해안도로를 독점했다. 상쾌했다. 흥분한 아침 바다의 마음 그대로 오설록 티하우스에 올라갔다.

티하우스에서는 세작을 마셨다. 왜 나는 메뉴판을 보면 기존의 모든 결정이 리셋되는 걸까. 원래는 녹차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했다. 세작은 우유처럼 기름지다. 신기한 맛이다. 덕분에 충동적으로 티백을 샀다. 오설록과 이니스프리 모두 기념품이 훌륭했는데, 그만큼 가격도 있었다.

오설록 옆에는 이니스프리가 붙어있고, 그 옆으로 녹차밭이 아주 아름다웠다. 알고 보니 길 건너편에 더 큰 규모의 차 밭이 있었다. 보성에 가보고 싶어 졌다. 제주도에서 보성을 그리워하는 사치를 부렸다. 멋진 건물과 대지, 기념품들을 보면서 역시 자본이 좋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 많으면 작은 일도 크게 할 수 있다.


마무리

여행 내내 행복하다는 말을 몇 번씩 했다. 물론 차를 긁어서 30만 원을 지출했을 때는 불행했지만, 5일 내내 좋았던 날씨 값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무언가를 느끼고 싶어서 강한 의지로 떠난 것이 아니었다.  퇴사하고 뭐 할 거야? 에 대한 대답이 궁색해서 여행이라도 갈까 싶어요,라고 이야기한 게 다다. 남들이 다 가는 여행 나도 가야 할 것 같으니. 줏대 없이 시작했지만 여행 내내 자유롭고 즐거웠다. 다만 자유와 즐거움은 내가 타지에 홀로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떠나온 곳에 나의 집과 고양이와 직업과 친구가 있고,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여행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나는 잠깐 오랜 생존에서 벗어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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